은중과 상연(드라마)
가을비가 며칠째 내리던 날, 삼일동안 아내와 함께 넷플릭스 시리즈 ‘ 은중과 상연’을 봤다. 그 드라마는 10대에서 만나 40대 초반까지 매 순간 서로를 가장 좋아하고 동경하며, 또 질투하고 미워하며 일생에 걸쳐 얽히고설킨 두 친구, 은중(김고은)과 상연(박지현)의 모든 시간들을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선망과 원망사이, 어느 트위터리안은 그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은중과 상연’이 아닌 ‘은중과 쌍연’이라고 말했다.
‘은중과 상연’은 두 친구가 11살, 21살, 32살을 거쳐 43살에 재회하며 겪게 되는 우정의 연대기를 에피소드에 담았다. 첫 만남, 4학년 때 은중이 반장이던 상연에게 자습시간에 떠들었다고 오해를 받고 불려 나가 상연에게 손바닥을 맞았다.
고학년이 되면서 학급대항 피구시합에서 은중이 일부러 상연만 공격해 머리에 공을 맞히면서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그 시절에서 한 뼘도 성장하지 못한 상연과 나이에 맞게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가는 은중의 삶이 비교되었다.
10대부터 40대까지 매번 다시 만날 때마다 상연은 은중에게 상처를 주고 상흔을 남긴다. “미워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거야, 싫어하는 건 생각이 안 나서 좋은 거고 미워하는 건 생각나서 힘든 거야”라는 은중의 대사가 좋았다. 미움은 비효율적이니까.
은중은 계속 상연에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녀를 끊어내지 못한다. 언제나 우리의 약점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상연 같은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은 그런 우리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고, 늘 그걸 이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람을 다룬다.
만남이 불편한 사람과는 안 만나는 것이 최선이다. 누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너를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냥 안 보고 사는 게 최선이야. 그렇게 할 수 없으면 무시해”
내 잘못이 아니라면, 그 문제의 해결은 상대방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괜히 노력하다 안되면 내 마음만 다칠 뿐이고 더 미워하게 될 뿐이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또한 성정체성, 조력에 의한 안락사 문제등을 함께 다뤘다. 기대와 달리 넷플릭스 오픈 후 며칠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40대에 접어든 상연이 말기 암에 걸려 은중에게 조력 사망을 위한 마지막 스위스 여행을 부탁하는 모습은 우리의 눈물샘을 크게 자극했다.
그 스위스여행 이야기가 나오면서 마지막에 집중력을 잃었다. 우정이든 연애든 한 번 상처 준 인간은 다시 안 만나는 게 좋다. 만나면 또 상처를 주니까. 사람 잘 안 변한다. 두 주인공이 삼십 대에는 아니 만났어야 했는데, 다시 상처 주고 돌아서는 드라마 구조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뜬금없게도 진짜 이유는 오래전 읽고 보았던 이문열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라는 영화 속 오스트리아의 마지막여행 장면이 오버랩됐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여성 특유의 그 셈세한 감정선과 디테일을 잘 살렸다.
탄탄한 극본과 누구나 그 시절에 한 번쯤 겪었을 수 있는 보편성, 그리고 주인공 김고은, 박지현 배우의 열연이 그 넷플릭스 돌풍의 이유일 것이다. 그 드라마 내용과 달리, 친구끼리 이기고 지고가 어디 있다고, 다 각자 자기 인생이다.
“누가 널 끝내 받아줄 수 있겠니?” 이 한마디가 은중의 상연에 대한 감정을 잘 표현해 준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취향이 100퍼센트 맞는 사람도 있을 수 없지만, 부모가 아닌 그 누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그렇게 헌신적일 수 있겠는가.
취향이 100퍼센트 맞는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 아니면 사이비를 의심해야 한다. 어떤 목적이나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맞춰주는 것뿐이니까. 누구든 나를 내가 아닌 모습으로 만드는 사람과는 헤어지는 게 맞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의 상우(유지태)처럼.
그 드라마 중 상연의 독백 ‘나의 생애’라는 글이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은중과 상연’은 은중이가 하는 상연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조이다. 마지막 스위스 여행에서 상연이 은중에게 “네가 날 받아주는구나, 끝내.. “라는 말을 했다.
문득, 내가 20대의 은중을 만났다면 30대엔 다시 상연을 받아줄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약점은 늘 좋은 사람이니까. 그 약점에 발목 잡혀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조금 살아보니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건 나쁜 인간들에게서 멀어질 줄 아는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