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의 노래들
아이돌에 큰 관심이 없던 몇 년 전이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몹시도 내 귀를 사로잡았다.
여느 아이돌 노래와 다른 느낌이었고, 분명히 내 취향인데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궁금한 마음에 작곡가를 봤는데 1Piece라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좀 더 찾아보니 내가 왜 이 노래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었다. 1Piece는 윤상이 꾸린 작곡팀이었던 것이다.
윤상의 노래들을 들으면 아! 윤상이다 싶은 지점이 있다. 음악적 견해가 모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특유의 코드가 있는 것 같다. 윤상은 가수보다는 뮤지션으로서 더욱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우리 대중음악에 전자음악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신해철과 <노땐스>라는 프로 젝트 팀을 만들어 테크노/일렉트로닉 앨범도 냈다. 이런 연유로 개인적으로 인터뷰할 수 있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윤상의 무드가 가득한 앨범은 2000년 발매된 정규 3집 <Cliché> 다. 당시 내가 고1이 된 시점이었는데, 같이 살던 외삼촌이 길보드차트에서 사 온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어서 결국 용돈을 탈탈 털어 CD로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특히 Disc 1에 있는 노래들은 지금도 자주 듣는 노래들이 많다.
전자음에 담긴 서정성, 가사의 깊이와 철학이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정말 듣기 좋고 따라 부르고 싶은 무드가 담겨있다.
아픔 없는 상처는 없지,
책임져야 할 필요 없는 사람 따위
모두 거짓말,
모두 새빨간 거짓말
이 노래를 한창 들었을 시기엔 잘 몰랐는데, 가사를 찬찬히 보니 엄청 사회비판적인 노래였다.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누군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Real life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덤덤히 담겨있다. 그땐 인터넷이었고 한때는 가상현실이라면 지금은 메타버스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메시지보다는 저 가사의 발음과 정서가 멜로디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뿐이었다.
며칠째 귓가를 떠나지 않는
낯익은 멜로디는
또 누구와 누가 헤어졌다는
그 흔해 빠진 이별노래
거짓말처럼 만났다가
결국은 헤어져버린 얘기
상투적인 이별얘기에 염증이 났지만 이내 자신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돼 버렸다. 윤상의 담백하고 무심한 톤은 과한 감정의 언어조차 담담하게 만들어 주기에 슬픔 대신 아련함을 자아낸다.
때마침 떨어진 차가운 빗물이
어색한 눈물을 감춰주었지
하지만 괜찮아 다 알고 있으니
너도 깜짝 놀랐을 테니까
파리지앵의 정서는 어딘가 모르게 내게는 이질적이었다. 거의 모든 지분이 장근석에게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파리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는 것보다 이 노래에서 풍기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정서가 좀 더 내 취향의 파리지앵에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이 노래는 사실 윤상의 모든 노래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템포와 가사, 무드 모든 것이 듣기에도 좋고 부르기는 더 좋다. 투개월 출신 김예림(Lim Kim)이 진행하는 새벽 라디오 생방송에 이 노래를 신청했다가 덜컥 사연과 함께 방송됐던 남모를 기쁨이 담긴 노래이기도 하다.
<Cliché> 앨범에는 없지만, 또 한 곡 애정하는 노래가 있다. 원곡은 윤상 <2집 Part I>(1992)에 수록됐는데, 다른 보컬리스트가 참여한 리메이크 앨범 <Song Book>(2008)에서의 버전이 더 좋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보컬리스트 조원선과 함께 부른 <넌 쉽게 말했지만>이다.
그리고 이건 최근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소수빈이 커버한 무대, 이 무대도 무척 마음에 든다.
윤상의 노래는 음역대가 높지 않아서 보컬의 톤과 무드가 중요한데, 그래서 원곡자인 윤상이 불러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부르면 더 좋을 때도 있다. 이 노래가 딱 그렇다.
오늘 퇴근길엔 윤상의 노래들을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