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우선순위
"하나의 컴퓨터가 동시에 여러 개의 작업을 수행하는 일. 다중 프로그래밍과 비슷하지만 뜻이 약간 다르다. 태스크라는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프로그램이나 프로세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컴퓨터 쪽에서 볼 때의 작업 단위를 이른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발췌)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사람, 멀티태스커를 미덕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민망하지만 총각 시절 이성에게 건넨 소위 '작업멘트' 역시 "전 멀티가 되는 사람이에요."였으니 말이다.
멀티가 미덕으로 칭송받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2002년 월드컵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4강 진출 원동력으로 '멀티플레이어'를 꼽기 시작했으니까. 한 명의 플레이어가 경기 상황에 따라 공격수, 수비수, 미드필더 역할을 잘 수행한 후로, 멀티플레이어라는 말이 유명해졌고, 멀티는 대단한 장점이 됐다. 사회생활에서도 다재다능한 멀티플레이어가 각광받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연예계에서도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이름으로 혼자서 다 해먹는 사람들이 인기를 얻었다.
잠깐, 나조차도 혼동하고 있다. 엄밀히 멀티플레이어와 멀티태스커는 다르다. 멀티플레이어의 장점이 결코 멀티태스킹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멀티플레이를 잘하는 사람도 멀티태스킹을 잘할 수는 없다. 그는 그저 공격하는 순간에는 공격을 잘하는 것이고, 수비하는 순간에는 수비를 잘하는 것이다. '공격하면서 수비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언제부턴지 멀티플레이를 멀티태스크로 착각해 스스로를 닦달하고, 압박하며 살아왔다는 자각을 최근에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습관에서 기인했으리라. 상대방과 대화하면서도 다른 이의 카톡 답장을 보내고,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뭐 그런 이상한 습관들 말이다.
결국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러 가는 길에 쓰레기가 눈에 띄어 버리러 간다. 쓰레기를 버리려다 문득 아까 우유를 마시고 헹구지 않은 컵이 보인다. 결국 나는 우유컵을 헹구고 다시 핸드폰을 본다. (쓰레기는 여전히 내 손에...)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정된 업무를 하려다 문득 메일을 보고 급하지도 않은 회신을 한다. 회신 메일을 쓰던 중 갑자기 자료 정리 업무가 훅 치고 들어온다. 그 업무를 끝내고 나면 아까 쓰던 메일 회신을 하고, 밀린 카톡에 답한다. 그러다 퇴근한다. 다음 날 출근해서 생각난다. '어? 뭐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단언컨대 멀티태스킹은 절대 불가하다. 멀티태스킹의 사전적 정의에 나온 주어는 심지어 컴퓨터다. 사람이 아니다. 멀티태스커라 자부하다 보면 그냥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뒤엉켜 반드시 놓칠 수밖에 없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이라면, 그저 쓰레기를 버리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본 우유컵을 헹구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거나 자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괜한 나이 핑계만 댔다. 사실 대부분의 멀티플레이어들은 어느 정도 나이 들어서야 재능이 빛을 발하는 건데 말이다. 그리고 그런 멀티플레이어가 잘하는 것은 멀티태스킹이 아닌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다.
누군가 '껌 씹으면서 걸어갈 수 있지 않냐'라고 반문한다면, 그러면 된다고 답할 일이다. 그리고 덧붙이면 된다. '하루에 껌 씹으면서 걸어가는 것보다 한꺼번에 처리해야 할 어려운 일이 부지기수'라고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