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살다 보니 입주민들끼리 오픈카톡방을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는 경우가 잦다. 어차피 익명인 데다 왕성하게 활동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공사나 환경 관리 일정, 주변의 주요 행사 소식, 맛집 같이 알아두면 좋은 정보를 놓치지 않으려 눈팅만 하고 있다. (브런치를 포함한 모든 SNS는 내게 눈팅용이다)
이런 오픈카톡방에 있다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단지의 가치를 높여 집값에 반영시키는 방안을 도모하는 부류인데, 글쎄...... 부동산 투자에는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서 그런지 크게 흥미는 없다. 다만,
집값이 오르는 게 뭐가 나빠?
라는 정도의 마음가짐이다. 엄청난 상급지도 아니고, 그냥 세 식구 몸 하나 마음 편히 뉠 곳 찾아 좋(다고 생각하)은 타이밍에 잘 마련했으니 그걸로 됐다. 그저 좀 더 환경적으로 살기 좋아지고 아주 나중을 생각해 집값이 오른다면 나쁠 것 없겠다 싶은 마음 정도? 증여한답시고 집 좀 싸게 내놓지 말라든지, 빨리 팔아넘기려 집값을 후려치는 상가 부동산의 행태를 비판한다든지, 주변에 XX선 지하철이 들어온다든지. 이런 식으로 당장 집값이 얼마가 오르내리고, 호재니 악재니 하는 말들에는 조금 피곤하다.
피곤은 문제가 아니다. 짜증 나는 경우가 문제다. 바로 핑거 프린(세)스들의 이야기다.
정작 부동산 악재에는 무심하면서, 이런 일에 화가 나는 나란 닝겐 무엇!? 출퇴근 길에 잠깐 들러서 물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정보, 포털사이트나 그 오픈카톡방에서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는 정보들을 스스럼없이 묻고,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 해결하려는 마인드가 몹시 불쾌하다.
몇 년 전부터 출근 후 컴퓨터 부팅을 하면 늘 이 이미지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배경화면으로 지정해 뒀다.
7번 조항을 주목해 보기 바란다.
물어보기 전에 검색해 보기
다른 항목들은 어느 정도 몸과 입에 익어서 조심하는 편인데, 유독 7번 만은 툭툭 어겨댄다.
XX님, 그 품의서 언제 쓴 거죠?
OO님, 지난번 보내주셨던 메일 다시 한번 포워딩 좀 해주세요 (아, 물론 찾아보진 않았다)
△△님, 오늘 점심은 어디 식당으로 가요?
착한 후배님들은 한 번도 귀찮은 내색 없이 다 들어준다. 하지만 안다. 분명히 속으로는 욕이든 짜증이든 뭔가 블라블라하지 않았을까.
선배 입장에서 항변을 해보자면
① 사내든 사외든 정보도 많아지고 플랫폼도 많아져서 내 깜냥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② 보안정책상 자료를 오래 보관할 수 없어서
③ 후배들의 성장과 자기 결정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은근슬쩍 의사반영이나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
맞다. 다 개소리다. 짜친 변명인 것, 알고 있다. 내적으로는 기억력 감퇴, 외적으로는 물들어 버린 권위 의식 탓일 게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핑거 슬레이브'가 되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절대로 어딘가 있는 정보를 남에게 물어보지 않고, 지어내서라도 어떻게든 내 선에서 해결한다. 심지어는 누군가 뭘 찾아달라고 하면 위든 아래든 가리지 않고 찾아서 알려준다. 이렇게 하면 그동안 누적된 핑프의 이미지를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핑프들을 향한 나의 불쾌함이 내로남불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에겐 같잖은 얘기겠지만 문득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예전엔 잘 몰라서 그런가보다 했던 것들이 이제 나이 좀 먹었다고 다 아는 것처럼, 내가 옳은 것처럼 굴 때가 많다. 사실 급하면 물어볼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을 또 기꺼이 찾아서 알려주는 자발적 핑거 슬레이브들도 많은데.
불현듯 나이 들수록 스쿼트를 가장 중요한 운동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떠올랐다. 엉가남(엉덩이가 가벼운 남자)이 되기 위해서. 엉가남이 돼야겠다는 다짐은 비단 집안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서도 카페 진동벨이 울리면 직접 가서 음료를 가져오고, 사무용품 심부름이 생기면 마실 겸 다녀오고, 회식장소에서 냅킨을 깔고 수저를 놓고 반찬을 리필하는 일에 뒷짐만 지고 있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 좋은 사람 콤플렉스일 수도 있고, 나이듦을 향한 선입견,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은 발칙한 마음도 있다.
나만의 핑프논란을 돌이켜 보건대, 세상은 평화로운데 억지로 균열을 내는 건 나일지도. 어리석게도 그 균열을 내가 내놓고 괴로워하는 것도 나다. 가끔은 세상을 자식을 대하는 부모가 아닌, 손주를 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바라봐야겠다.
우리 핑프쟁이는 어째 그럴까 허허
이 할애비가 사탕 하나 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