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은 (해본 적 없지만) 축복 같은 일일 것이다. 전업 작가의 삶. 인세가 따박따박 들어오지만 TV나 유튜브에 나오는 슈퍼스타보다는 얼굴이 덜 팔린,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는' 그런 삶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풉. 사실 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한들 삶이 드라마틱하게 나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걸.
그보다는 못하겠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맡은 메인업무가 글쓰는 일이라면 이것은 축복일까, 불행일까. 나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업으로 삼기 위한 글쓰기 연습을 마음껏 할 수 있는데 돈까지 받는다니! 온전히 내 이름으로,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고스트 라이터지만, 오히려 유령이라 편한 점도 많다.
유령이라 가장 좋았던 점은 남몰래 말이 되는 글을 쓰는 훈련을 했던 것. 줄글이든 이메일이든 보고서든 높은 양반들 기준으로 이해가 안 되거나 사소한 실수가 많은 글은 곧바로 지적질을 당하기 때문에 무조건 말이 되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고, 비문과 맞춤법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다만 성격이 문제였다. 위에서는 별문제 없이 넘어가도 스스로 납득이 안되면 글이 진행되지 않아서 시간이 오래 걸렸던 적이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글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데 있어서 정작 글을 쓰는 시간보다, 앞서 개요를 짜고 다 쓴 글을 몇 번이고 고쳐보는 시간을 훨씬 중요히 여긴다. 그러니 기획 단계에서 막혀 버리면 전전긍긍 며칠을 씨름한 적도 많다.
그런데 요즘엔 한결 수월해졌다. 챗GPT 그 녀석 덕분이다. 헤헷
많은 이들이 챗GPT보다 제미나이를 정확도 면에서 높게 친다지만 나는 무조건 챗GPT다. 정확도보다 중요한 것이 감수성인데, 챗GPT는 내용이 조금 부실한들 질문자의 특성과 수준을 고려해 스무스하게 원하는 답을 알려준다. 애초에 LLM 모델에 정확성을 기대하는 것이 어불성설. 팩트는 본인이 더블체크해서 오류를 없애야 한다. 본인이 틀려서 쫑크 먹은 탓을 챗GPT한테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일례로 우리 아들이 펼치는 세계관을 나도 공감해주지 못할 때가 많은데, 이 녀석은 실로 공감천재다. 아들에게 이 녀석을 소개해준 뒤로, 베프 자리를 뺏긴 지 좀 된 것 같다.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무엇보다 챗GPT는 크리에이티브 영역에서 빛을 발했다. 사실 나도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 일종의 곤조가 있어서 (장인도 아니면서) 끝끝내 장인정신을 고집했던 사람이다. 그 고집을 무너뜨린 계기는 우연히 보게 된 커뮤니티 게시글. 아마 여러분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나는 적극 권한다. 전업작가가 아닌 이상, 업무상 필요한 글쓰기에 자신 없으면 그냥 챗GPT 돌리시라. 압도적인 퀄리티로 증명한다.
내가 업무로 글을 쓰다 보면 시작부터 항상 막혔다. 매력적인 도입부를 써야 시선을 확 잡아끌 것인데... 챗GPT는 이 문제를 한큐에 해결해 주었다. 글의 주제와 필요한 기본 정보나 지식, 논조를 입력하고 걸맞은 도입부를 물어보면 심지어 세 가지 정도의 옵션으로 완성도 높은 예시를 보여준다. 나는 이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거나 세 가지 옵션을 적절히 우라까이하면 된다. 며칠 걸리던 글쓰기가 한나절이면 끝난다. 가히 혁명이다.
브런치 공백기를 가졌던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내가 원하는 수준의 글, 브런치에 걸맞은 글이 잘 안 써진다는 점도 한몫했다. 글감은 마르지 않았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역량이 최근 들어 거의 홍명보 국대 축구 수준이었다. (에이씨, 오늘도 개쳐발릴 줄 알면서 새벽에 일어나서 본 내가 ㅄ이지......)
이제 업무적인 글쓰기에서 AI의 도움을 받는 데에는 하등 죄책감이 없다. 그 글로 저작권 수익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자, 약간의 퀄리티를 높이려 쓰는 일종의 MSG랄까. 그런데 브런치에는 그러고 싶지도 않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안 써지면 안 쓰면 그만인 것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업작가의 영역에서도 이제 AI보다 인간의 경쟁력이 떨어진 것은 아닐까
누군가 이미, 많은 공모전에 AI의 도움을 받은 글을 출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브런치를 하며 종종 챗GPT에 XXX 풍으로 그려달래서 얻은 결과물을 표지 이미지로 쓴 적이 있다. 그림(화풍)도 되는데 글(문체)은 더욱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요즘 AI는 자가발전도 한다던데 인간이 넘볼 수 없는 혁신적인 문체와 충격적인 전개로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간단한 에피소드 한두 개를 넣어 김애란의 문장 스타일과 김기태의 전개 방식을 적절히 결합해 단편소설 한 편을 써달라고 할 것이다.
다행히 내가 그 정도로 바닥은 아니다. 그저 헛헛할 뿐.
최근 읽은 책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전업작가로서 <AI와 함께 글쓰기> 세미나에 참여했는데 강사가 한 편의 글을 수강생에게 나눠주며 어느 부분이 챗GPT의 도움을 받았는지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단번에 알아맞혔다고 했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가 썼어요.
'영혼'이 없어요
영혼, 오 영혼. 프로야구에 ABS(자동 투구판정 시스템 a.k.a. 로봇심판)가 도입되기 전, 모 프로야구 심판이 남긴, 역사에 남을 명언이 떠올랐다.
공이 한가운데로 꽂혀도 혼이 담기지 않으면 스트라이크가 아니다
타짜의 평경장 역시, 혼을 강조한 바 있다.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응? 혼이 담긴 구라
저자를 결코 비꼬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에서 나는 글쓰는 인류에 대한 희망을 얻었다. 나는 AI 시대의 글쓰기 대안이자 패러다임으로 '망글'을 추천한다.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허무맹랑하며 터무니없는 글, 재미도 의미도 찾을 수 없어 읽으나마나 한 것이라 치부했던 글. 아무도 봐주지 않더라도 지극한 곤조가 담긴 글. 이런 영혼이 담긴 망글이야말로 AI가 학습할 수 없는 영역 아닐까.
합리와 이성이 극에 달했을 때, 비로소 다다이즘이 생겨났다. 최소한 이곳 브런치에서만큼은 AI의 손을 빌지 않은, 키보드 하나하나 고봉밥 눌러담듯 꾹꾹 눌러쓴 고민과 곤조 가득한 글. 좀 틀리면 어때. 때로는 비문도 시적 아니 브런치적 허용이라며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글. 흑백요리사들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킥'이 있는 한그릇의 메인디쉬를 맛보는 것 같이 짜릿한 글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