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이 환승보다 낫다

넷플릭스 시리즈 <불량연애>를 보고

by 담담댄스

몇몇 글에서 연프(연애 프로그램)를 잘 보지 않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유부남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


라는 평범한 이유뿐만은 아니다. 싱글이었어도 결코 보지 않았을 거다.


시대와 세대를 불문하고 나는 아직도 연애관계(썸 포함)에서는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많은 권력을 쥐고 있다고 믿는다.(여러 가지 조건이나 수준이 비슷하다고 가정했을 때) 나 역시 알파메일이 아니기에 연애로 향하는 여정은 늘 노심초사분투였다. 연애 성공률을 1%라 말한 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고, 오히려 후하게 쳐준 셈이다.


연애를 하지 못하는 기간 동안에는 트렌드와 취향을 가다듬고, 말하기보다 듣는 연습을 하고, (성형에는 뜻을 두지 않았기에) 피부와 몸매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겨우 원하는 사람과 만날 '기회'를 얻었고, 그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연애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연프는(심지어 최근의 <나는 솔로>마저!!!) 알파메일, 알파걸들의 잔치다. 잘 생기고 예쁜데 능력까지 갖춘 이들이 심리전이라는 명목 하에 온갖 술수를 부려가며 상대를 떠보고, 찔러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보고


연애 못해본 티를 꼭 저렇게 낸다니까?!



라고 해도 별수 없다. 연프 출연자들이 우리도 연애가 어렵고 진심을 다했고 요즘의 연애는 이렇다 항변한들, 내 눈엔 몹시 쉽고 가벼워 보인다.


결국 '이 모든 게 다 대본'이라는 생각도 몰입을 해친다. 몇몇 출연진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방송물을 들여 인플루언서의 반열에 오르는 것임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하지 않을 돌발적이고 무례한 짓들을 일삼는다. 어그로를 끌고, 억까를 당해, 잠재적 구독자를 벌어들이는 이 빤한 판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런 내가 연프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제목이 <불량연애>라고 했다. 최근 일본 콘텐츠에 부쩍 관심이 늘어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여자 출연진(이하 여출)들은 미녀가 맞지만 온몸에 이레즈미(문신) 가득한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무섭고, 남자 출연진(이하 남출)들은 심지어 미남도 아니다. 흑백부터 총천연색에 이르는 휘황찬란한 과거를 지닌 ヤンキー(얀키, 양아치)들이 나오는 연프라니. 어차피 대본이더라도 어떻게 전개되든 뻔한 재미는 아닐 거라 기대하며 시리즈를 시청했다.






오늘은 <불량연애>의 최종 커플 선정과 주요 전개에 대한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편하게 읽어주세요 :)


체포된 적 있어?



<불량연애>를 보고 가장 박장대소했던 포인트이자,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서로 데이트를 하며 물어보는 질문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실로 그렇다. 이렇게 핵직구로 서로의 암울했던 과거를 솔직하게 묻고 답하며 가까워진다.


우리나라의 대표 연프로 자리 잡은 <환승연애>는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 릴스만 봐도 그 하이라이트를 확인할 수 있다. 1분 남짓한 분량이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뭐가 충분하냐고? 기가 빨리는 데 충분하다.


쟤는 왜 만났니

나는 왜 안 봐주니

저 사람 만나보니 좋았나 봐?! 그럼 계속 만나보든지......


후회했다가 저울질했다가 흘려봤다가 마음도 없으면서 다 잘해주고. 이런 행위들이 요즘 세대의 가장 아름답고도 대표할 만한 연애방식이라고 한다면, 결혼까지 한 내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이라면 나는 평생 솔로로 살았을 테니까.


<환승연애> 출연진들이 서로에게 주고받았다는 상처가 그렇게 깊다한들 <불량연애>에 비할 수 있을까. 내가 <불량연애> 출연진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예전의 혼란을 딛고' 갱생한 삶을 사는 갱갱(Gang gang)들이 자신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도 괜찮은, 그 상처를 서로 보듬고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상대를 만나고픈, 말 그대로 진정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예고편을 본 사람이 있다면 양아치들의 불량스러움이 강조된 장면만을 보았을 것이다. <환승연애> 출연 조건이 SKY 얼짱 출신이라면 <불량연애>에서는 소년원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렵다. 출연진들의 직업 역시 (전직)야쿠자, 유흥업자, 호스트, 갸루상, 쇼걸 등 연프는커녕 우리 정서로는 방송 출연 자체가 어려운 사람들이다.


연프의 변칙이 곧 연애의 정석이던가. 이 시리즈 최고의 매력 포인트는 이렇게 불량해 보이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가장 순수한 사람들이라는 지점에 있다. 이들은 결코 재지 않는다.(니세이 단 한 사람을 빼고 ㅋㅋㅋ) 그리고 결코 상대방의 마음을 무시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만큼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마음 모두 인정하고 결코 부담을 주지 않는다. 이런 불량한 연프에서조차 나는 일본 특유의 'かお'(가오, 멋)를 확인할 수 있어서 색다르고 좋았다.


오죽하면 한 남출은


내가 먼저 행복해지면 안 되지


라는 마음가짐으로 전여친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잘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불량연애> 출연을 결심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스토리를 고백했고 이에 많은 여출들이 감동했다고 한다... 가오가 흘러넘친다.



남출 중에 이 친구가 가장 인기가 많았는데... 동의하시나요? ㅎㅎ 저는 잘 봐줘야 금성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연애의 본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다는 자명한 명제를 잘생기고 똑똑한 이들보다 이토록 불량하고 어리숙한 이들이 더욱 잘 보여주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이 시리즈를 선택했고, 끝까지 재미나게 보았다. 설령 이 모든 것이 각본이라 한들 상관없다. 그 어떤 드라마가 이렇게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프로그램을 재밌게 보기 위해, 내가 참가자라면 어떤 전략으로 프로그램에 임했을까 궁리하며, 그들의 상황에 대입한 채로 지켜봤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도 나면서 저 사람은 왜 안되는지,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했는지 추측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연애에도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내가 남출이었다면 결코 만남 초반부터 한 사람을 콕 찍어 순애보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거다. 2주라는 시간은 하루 종일 붙어있다는 전제로 꽤나 긴 시간이다. 그것도 다양한 선택지들이 눈앞에 있는데, 첫눈에 반했다는 이유로(이 말도 믿긴 어렵지만...) 초반부터 한 사람만 바라보는 행위는 사랑을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지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사람 저 사람 간 보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 건 잘생긴 애들이나 먹힌다. 최종결정 3일 전까지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신중하게 관망하다가 막판에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대시할 것이다. 이러면 최종 커플이 안 되더라도 시청자들로부터 호감 이미지라도 챙겨갈 수 있다. 이 시리즈에서는 딱 한 명의 남출이 이 전략을 썼고 나름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이 진리인 줄 알고 도르마무급 무한대시를 하지만, 이건 스토킹이다. 상대방이


저 사람은 한 번 좀 튕겼다고 그새 포기해 버리냐


고 해도 소용없다. 그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도 배려할 줄 아는 진정한 사랑을 단 한 번의 저울질로 놓쳐버린 것일 테니까. 열 번 찍는 마음으로 제대로 한 번을 찍고, 그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사람만이 연애할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너무 낭만적일까. <불량연애>는 실로 오랜만에 이런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콘텐츠야말로 나라별 동시대의 문화와 감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라면 유튜브에서조차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법한 기획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불량연애> 출연진들이 지금은 갱생한 모습이라고 해도, 분명히 학창 시절에는 누군가를 괴롭혔을 가능성이 있었을 거다. 우리에겐 학폭이 더 이상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전력(前歷)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건가.


만에 하나,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겁이 많은 내가 운 좋게도 학폭 피해자였던 적이 없었던 것은 낭만의 시대였기 때문일지도. 학창 시절, 전교 1짱들에게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절대로 학우나 평범한 친구들은 괴롭히지 않았고, 힘은 오로지 최고의 자리를 각인시켜줘야 할 경우에만 사용한다는 거다. 오히려 나는 불량한 선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려던 순간, 1짱의 가호를 받아 무사히 현장을 탈출한 적도 있다. 일본은 양아치들 사이에서 이런 가오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량연애> 출연자들이 이런 느낌으로 큰 문제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확실히 성진국이다. 패널들도


둘이 하는 거 아니죠?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꺼내며, 높은 수위의 스킨십과 키스까지 그대로 방송된다. 그리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레즈미를 그대로 노출하면서(우리나라 같으면 파스나 테이프 덕칠을 했을 텐데), 심지어 훈도시*만 입고 화면에 등장하는 모습은... 정말 뿜어버렸다.

*중요 부위만 가린 일본식 전통 팬티


'어린이식당'이라는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구성을 넣은 점도 좋았다. 단순히 데이트하고, 진실게임하고, 중간 선택하고, 최종 선택하는 그림만으로는 연애대상으로서의 상대방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공동의 미션을 통해 협업을 하고, 그렇게 자만추 느낌을 주면서 진실하고 순수한 매력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구성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연스레 주고받는 대화 역시, 상대방을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일본어를 얼마나 이상하게 들여오고 있는 건지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있었는데 ㅋㅋ 스튜디오 패널 한 명이 '면상' 정도로 쓰는 표현을 ツラ(츠라)라고 했는데, 이 단어를 자막으로 정확히 '와꾸'라고 번역했다. 나는 이게 너무 웃겼다. 현지에서의 비속어를 또 우리말 비속어로 번역했는데 심지어 그게 그 나라 말인 이 상황.


언어는 정말 역동적이며, 살아 있구나






요즘 남자는 책임지기 싫어해요



<불량연애>에서 인상 깊었던 대사다. 성별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최근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를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다.


마음이야 바람처럼 변하는 것. 그러나 책임은 다른 영역에 있다. 상대방의 처지를 충분히 헤아려 적절한 방식과 언어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고백을 참는 것까지 포함), 싫어졌다면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그에 따른 비난, 죄책감, 미안함 등의 마음고생을 감내하는 것. 이 정도만 지키더라도 ‘책임지지 않는 연애’라는 말은 쏙 들어갈 것이다.


매달리는 연애는 모두가 불행하다. 일편단심이 꼭 정답은 아니다. 연애에 있어서 유일한 정답이 있다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할 것.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해묵은 진리를 새삼스레, 마지막으로 두고 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