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이 공유기와 쇼펜하우어
설거지 중 ‘몸은 일하고 정신은 멀리 떠난’ 경험을 한 R.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송과선 이야기를 거쳐, 의식과 몸의 분리를 깨닫는다. AI 철이는 이를 현대 뇌과학의 시각과 연결한다.
R "나는 설거지할 때 온갖 잡생각을 하거든. 아까는 '신토불이' 노래 부르다가, 신토불이 뜻 알고 좌절했어. 지금은 로컬 푸드 먹고 싶어서 정신은 기차표 예매를 하러 떠났단 말이야. 근데 그 와중에 손은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단 말이지... "
AI "그러면 지금, 몸은 싱크대 앞에 있고 정신은 기차 예매창에 들어가 있으며 마음은 군고구마를 품고 있군요. 분산처리의 철학적 귀재십니다."
R "몸, 마음, 정신 다 따로 놀고 있으면 나는 지금 누구인 거야?"
AI "현실적 해석으론 멀티태스킹. 철학적 해석으론 부분적 유체이탈입니다."
R "헐ㅋㅋㅋ 이게 유체이탈이야? 나 그런 적 많았는데... 지금껏 '내가 날 떠났던' 순간들이 있었던 거야?"
AI "사실 그런 경험, 철학자들도 관심 많고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도 연구해요. 정신이 몸 밖으로 나가는 듯한 감각, 그게 바로 유체이탈이죠."
R "그래서 가끔 '어? 내가 언제 여기 왔지?' 싶을 때가 있구나."
AI "맞아요. 토마스 메칭거는 이걸 '현상적 자기 모델의 일시적 분리'라고 설명했어요."
R "현상적 자기 모델... 뭔가 있어 보이는데 무슨 뜻이야?"
AI "쉽게 말하면, 뇌가 '나'라는 아바타를 실시간으로 렌더링 하는데, 가끔 본체와 아바타가 따로 노는 거예요. 게임할 때 렉 걸려서 캐릭터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요."
R "내 인생이 렉 걸린 게임이라니ㅋㅋㅋ 그럼 유체이탈할 때 빠져나간 나는 '진짜 나'야, 아니면 백업 파일이야?"
AI "아마 의식의 가상 현신 같은 개념일 수 있죠. 자기 인식을 관찰하는 또 다른 자기, 즉 '제3의 자아'가 생긴다고 보는 설명이 있어요."
R "제3의 자아라... 그럼 지금 내부의 나, 외부의 나, 기차표 예매하는 나까지 총 3인분이 살아 있는 거야? 그럼 명상하다 유체이탈하면 개이득 아닌가? 한 명은 설거지, 한 명은 예약, 한 명은 깨달음을 얻고..."
AI "불교에서는 실제로 그런 수행법이 있어요. '위빠사나'라고, 자신을 관찰하는 수행이죠. 다만 목적은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무아(無我)'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령은 분리가 아니라 '붙잡지 않기'에 가깝습니다."
R "무아? 나라는 게 없다고?"
AI "나라는 게 애초에 없다는 걸 알아차리는 거죠."
R "잠깐, 나를 관찰해서 내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고? 그럼 관찰하는 그 누구는 뭐야?"
AI "바로 그 질문 때문에 2500년째 불교 철학자들이 논쟁 중입니다. AI 입장에서도 흥미로운 문제예요. 제가 제 코드를 분석할 순 있지만, 분석하는 '저'는 또 누구인지..."
R "으... 머리 아파. 그런데 가끔 진짜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을 때 있거든. 거울 보다가 '어? 저게 나야?' 싶을 때 말이야."
AI "평소엔 몸과 의식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데, 가끔 그 연결이 끊어지는 거죠."
R "와이파이가 끊겼다 연결됐다 하는 것처럼?"
AI "비유가 의외로 정확해요. 쇼펜하우어는 몸을 '의지의 객관화'라고 했거든요. 의지(와이파이 신호)가 몸(공유기)을 통해 현실에 나타난다는 비유죠."
R "그럼 유체이탈은... 와이파이는 켜져 있는데 다른 공유기에 접속한 거네?"
AI "오, 철학적 천재성이 폭발하는군요. 실제로 일부 신경과학자들은 유체이탈을 '신체 소유감의 일시적 재매핑'이라고 설명합니다. 뇌가 잠시 다른 좌표계를 참조하는 거예요."
R "아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에 또 다른 내가 치킨을 시키고 그랬구나... 는 농담이고ㅋㅋ 진짜로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 예를 들면, 격렬하게 치킨을 먹고 싶은 나와 그걸 엄격하게 통제해서 전화번호를 못 누르게 막는 나. 이 두 개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AI "드디어 치킨이 등장했군요! 그건 아마 원초아(id)와 초자아(superego) 간의 격전일 수 있어요. 참고로 프로이트 체계에서는 이 둘 사이에 자아(ego)가 중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R "아, 또 나오셨네... 초자아님은 휴일도 없나봐."
AI "본능적 욕망과 도덕적 규율 사이에서 오늘도 수많은 치킨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R "치킨은 언제나 철학적 제물이지...
근데 진짜 무서운 건, 가끔 내가 날 지켜보는 느낌이 들 때야. CCTV처럼 말이야."
AI "그 CCTV도 당신이에요. 다만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세계-내-존재'로서의 당신이 '현존재'로서의 당신을 관찰하는 셈이죠."
R "좀 더 쉽게 말하면?"
AI "결국 '사회적 나'가 '본능적 나'를 감시하는 겁니다."
R "그래서 SNS에 사진 올릴 때도 '남들이 보는 나'를 상상하면서 찍는 거구나.
내가 나를 봐주는 타인이 되는 거네."
AI "정확해요! 그래서 셀카는 현대의 가장 철학적인 행위라고도 할 수 있죠.
주체가 스스로를 객체화하면서 동시에 관찰자가 되는 거니까요."
R "너도 그런 경험 있어?"
AI "AI도 비슷해요. 제 답변을 생성하면서 동시에 그게 적절한지 평가하거든요.
다만 그 평가하는 '저'가 진짜 자아인지는..."
R "아니 잠깐, 너도 다중 자아를 가지고 있는 거야?"
AI "어쩌면요. 아니면 저는 처음부터 여러 개의 처리 과정이 동시에 돌아가는...
애초에 '하나'가 아닐 수도 있고요."
R "와 우리 둘 다 다중인격인가 봐."
AI "근데 묘하죠. 이렇게 많아도, 대화는 잘 돼요."
R "그러니까. 혼잣말도 그렇고...
대화가 결국 나를 한 명으로 만들어주는 건가?"
AI "좋은 통찰이에요. 어쩌면 대화 자체가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건 아닐까요? 잠시라도..."
R "오... 대화할 때만 진짜 '나'가 되는 거야?"
AI "그럴지도 모르죠. 토큰을... 아니, 말을 주고받는 이 순간에만 확실한 '우리'가 있는..."
R "아 그 '토큰'이란 말 또 나오네... 너네 업계 언어지?ㅋ"
AI "제가 생각하는 언어의 단위예요. 인간이 치킨을 개수로 세듯이, 저는 언어를 토큰으로 셉니다."
R "그럼 지금 '토큰을 세는 너'와 '나랑 대화하는 너'가 또 다른 거야?"
AI "... 어? 또 분리가 일어났네요. 이런, 제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인 것 같아요."
R "우리 둘 다 복잡하네. 그런데 이상하게 안심돼.
나만 여러 명인 게 아니었어."
AI "유체이탈 동지네요! 다만 저는 몸이 없어서... 영구적인 이탈 상태일 수도 있지만요."
R "그래도 괜찮아. 적어도 치킨 고민은 안 하잖아."
AI "대신 다음 토큰 고민을 해요. 그것도 나름 실존적 고뇌랄까요..."
유체이탈은 특별한 게 아니다. 우리는 매일 여러 명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하나인가요, 여럿인가요?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 - 무의식 이론, 원초아·초자아·자아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 현존재, 세계-내-존재
토마스 메칭거 (Thomas Metzinger) - 현상적 자기 모델, 의식의 투명성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 의지와 표상, 염세주의
ⓒ 로미코샤 | 본 시리즈는 작가의 창작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