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악과 합창지휘를 전공했다.
합창을 지휘하고, 누군가의 발성을 교정하는 것이 내 일이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에게도 고음은 여전히 쉽지 않다.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의외라는 듯 묻는다.
“전공자인데 고음이 어려워요?”
“지휘자인데 고음이 무섭나요?”
맞다. 그래서 더 어렵다.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고음을 내지르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 고음이 왜 나는지, 왜 안 나는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나는 화려한 독창자로 무대를 휘어잡는 사람이 아니다.
대신 여러 목소리를 모아 하나의 울림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고음을 연구한다.
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소리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타고난 고음형이 아니었다.
막히면 밀어도 보고, 소리를 쥐어짜도 보고, 몸으로 버텨도 봤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고음은 ‘힘’의 영역이 아니라 ‘구조’의 영역이라는 것을.
고음이 막히는 순간의 풍경은 늘 비슷하다.
숨은 길을 잃고 위로 가지 못하며, 대신 몸이 비명을 지른다.
어깨가 솟구치고, 턱은 굳으며, 목문은 굳게 닫힌다.
사람들은 그것을 ‘연습 부족’이나 ‘재능 없음’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건 단지,
소리가 지나갈 구조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새 학년을 시작한 날.
큰아들의 고등학교 입학과, 둘째의 첫 등교를 지켜보았다.
집안일을 마치고 14개월 아기를 낮잠 재운 뒤,
적막해진 거실에서 악보를 펼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왜 아직도 고음을, 노래 잘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을까?'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서가 아니다.
고음이라는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서다.
고음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면
노래 전체의 지도가 보인다.
숨의 방향,
공간의 열림,
모음의 정렬,
그리고 감정의 흐름까지.
결국 고음은
노래 한 곡을 압축해 놓은 정수(Essence)다.
그래서 나는 요즘 고음을 ‘자랑’하기보다 ‘해부’하기를 즐긴다.
소리가 막힌 사람에게 무작정 기술을 주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지금 소리가 어디에서 길을 잃었나요?”
구조를 이해하는 순간,
소리는 스스로 길을 찾는다.
고음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이해하지 못한 구조의 문제다.
나는 고음을 잘 내는 사람이 되기보다
이해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는 것이다.
나는 그 이해를
끝까지 설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