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무지함 탓에 어떤 장소들을 묘사해 보겠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훗날 내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 보았을 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 강렬했던 존재감을 되살리려 애쓰고 그 글의 소곤거림에 귀를 기울여 보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진실은 가혹했다. 뭔가를 글로 쓴다는 건, 그것을 파괴한다는 의미였다. p108
동포들
"낯선 타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는 건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에요." p267
방랑자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공간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모든 곳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더욱 거대하고 만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세부 항목들은 사라지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모양을 잃어버리며 쪼그라들어서 불분명해진다. 낮에는 '아름답다' 혹은 '유용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들이 밤에는 마치 형태를 잃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가상으로 존재한다. 낮 시간에 드러난 형태의 다양성, 색의 현존, 음영 따위는 전부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p346
...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밤이 세상을 본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고, 더 이상 아무런 꾸밈도 포장도 없다. 낮은 빛이요 찬란함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예외이고 부주의이며 질서의 붕괴에 불과하다. 세상은 사실 어두 그 자체이며 거의 검은색에 가깝다. 움직이지 않으면 차갑다. p347
소설? 에세이?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둔 사유의 백화점인일까? 자꾸 책의 표지로 되돌아와 올가 토카르추크 '장편소설'임을 확인한다. 어디까지가 작가가 무에서 창조한 상상력일까? 이 세상에 완벽한 '無'는 없으며 서술자의 잠재된 경험이 다른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면 여기 100여 편이 넘는 에피소드에서 비록 서로의 시간, 장소와 주제의 연결고리를 찾지는 못했지만 단편 이야기 모두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결론을 내려본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해 주는 데는 이만한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글에는 그 사람의 관심사, 성향, 성품들이 드러난다. (음악에는 별 관심 없는 것 같고...) 포르말린 통에 관심 있는 건 근본에 대한 추구, 남들과 다르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 창의적이며 독창적인 시각이라고 해야 할까? 발걸음이 닿는 여행부터 마음이 닿는 여행까지 몸과 마음이 흘러가는 그곳이 여행지라면 우리 인간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다 할 때까지 여행자이고 목적이 있는 듯하다가도 흐려지기를 반복하는 목적 없는 방랑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를 기록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다면 지금 이 생각을 글로 남기는 일은 지극히 고결한 작업임에도 우리는 아쉬워한다. 무한에 가까운 광활한 생각의 깊이를 담아내지 못한, 담아낼 수 없는 글의 한계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결국 다시 그 사실은 글로 남기는 이 작업을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