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항구 맞잖아요.
항구에서.
통통배가 드나들고 여기저기 울어대는 갈매기, 저 멀리 하얀 물보라와 빨간 등대, 그 밑에 있을 포토 존을 연상했다면, 당신은 정상인. 뭐, 낚시하고 있는 그림도 나쁘지 않고요.
한여름, 해가 지는 서쪽 항구. 붉게 물든 노을이 청명한 하늘을 배경 삼아 천천히 바다 위로 번져간다. 그 풍경은 마치 오랜 시간의 준비 끝에 마무리된 집채만 한 설비의 선적 작업을 축복이라도 하듯, 조용히 빛을 흩뿌린다. 노을의 빛과 항구를 밝히는 조명이 함께. 쉽게 말해서 오늘 날씨는 최고라는 얘기다.
항구는 분주하지만, 그 속엔 묘한 고요가 있다. 마지막 컨테이너가 실리는 순간, 지난 일 년간의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 난난다. 그 일년간 팀이 모이고 설계하고, 제작하고, 테스트를 마친 설비를 수출하기 위해 선박에 설비를 싣는 날이다. 그래서 지금 그 설비를 선적하는 항구의 현장은 그간의 기다림과 긴장, 그리고 끝내 찾아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 한 순간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설비가 도착하는 목적지에서 벌어진 신나는 일들에 대한 기대감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지만... 그건 다음 날로 돌리겠다.
설비들은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다. 정형화되지 않은 설비의 조각조각들은 목재 박스로 포장되어 외부 충격에 대비한다. 박스 내부에는 흔들림을 흡수할 수 있도록 버팀목과 완충재가 설치되고, 외부에는 충격 감지 표식(Shock Indicator)도 부착된다. 이 표식은 운송 중 예상치 못한 충격이 가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단서이고 행여나 색이 변하면 “누가 내 박스를 흔들었는가”를 추적하는 단서가 되겠지만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만은 않기를 내심 기도할 뿐이다. 선적 전후에 반드시 이 표식을 육안으로 점검하고, 색상 변화나 파손 여부를 기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아무리 망치로 두드려도 색상이 변하지 않는 '충격 감지 표식' 불량품도 있긴 하지만..
선박의 종류도 화물의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컨테이너선은 규격화된 화물에 적합하지만, 크기나 형태가 제각각인 설비는 벌크선이나 천장이 없는 오픈탑 컨테이너에 실려야 한다. 박스의 수량, 무게, 부피—이 모든 정보가 선박의 선택과 선적 위치, 출항 일자를 결정짓는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항구에서의 작은 실수가 도착지에서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박스에는 고유 번호가 있고, 그 번호대로 정확한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이케아 가구를 조립하는데 조립 설명서를 중간 페이지부터 펼쳐보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설비도 조립하는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순서가 조금 틀렸다 하여 마징가 제트 왼쪽 다리가 오른쪽 손에 조립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현실에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번거로운 일이 벌어진다. 엉. 망. 진. 창.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정교함은 아름다운 예술과 다를 게 없게 느껴진다. 설비를 정교하게 분리하고 어딘가로 이동하여 다시 순서를 맞춰 조립하는 모든 과정은 마치 치밀하게 짜여진 오케스트라의 악보를 따라 연주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실수 없이 흘러가는 물류는 하나의 교향곡 연주회장다. 불협화음의 재즈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재즈에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인가?) 물류 수송의 정밀함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되어, 책임감과 노련한 경험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출발 전에는 포장 상태, 고정 여부, 표식 이상 유무 등을 체크리스트로 점검하고, 도착 후에는 통관 전후에 화물 상태를 확인하며 손상 여부를 기록한다. 모든 절차는 문서화되고, 그 기록 하나하나가 다음 3악장 마무리를 위한 여정이 된다.
다행히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서류는 틀림없었고, 안전하게 모두 선적이 완료되었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고, 오늘 그 마지막 박스가 실리고 나니 새벽 1시를 넘기고 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선박이 천천히 항구를 떠날 준비를 한다. 날씨도 맑고, 이동 항로에 태풍 소식도 없다는 것까지 확인하면 비로소 숨을 고른다. 저 설비가 도착하는 그곳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잠시 며칠간의 휴가를 낼 것이다. 휴식도 하고, 숨 고르기를 하는 건 다음 여정을 위한 마음의 정돈이다. 눈부신 조명과 바다 냄새, 고요함 속의 물결 소리 속에서 잠시 항구의 노을을 바라본다.
바흐 BWV 1031. Wilhelm Kempff 편곡한 피아노 버전이다. 잔잔하면서도 선명한 선율은 마음속 노을의 풍경이 된다. 항구의 잔잔한 바람처럼 감정을 감싸고, 선율을 따라가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홀가분하게 항구를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