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일하면서 사회부 기자를 못했던 게 한이 되어서일까.
나는 오히려 기자를 그만둔 후 사회 곳곳의 문제를 제보하며, 얼굴도 모르는 기자님들에게 기사화를 읍소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제는 내 일상생활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다.
첫 애를 낳았던 해, 정부에서 시행하는 <임산부 친환경 농산물 지원사업>을 통해 쌀과 농수산물 등 식재료를 종종 구입하고 있었다. <임산부 친환경 농산물 지원사업>은 임신 중 기간이나 혹은 출산 후 1년 이내까지 지역의 농수산물들을 정부가 80% 지원하고, 나머지 20%는 자부담으로 결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조리원에서 만난 엄마들 사이에서 이 <임산부 친환경 농산물 지원사업>을 통해 구매한 식품들이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속속 터져나왔다.
"나 저번에 OO 샀는데 다 썩어서 왔잖아" "나도 저번에 OO 샀는데 다 버렸어"
처음에는 그래, 일부만 그랬겠지. 전체 농산물이 다 그러진 않을 거야 하면서 흘러넘겼다.
그런데 네이버 대표 맘카페에서 대대적으로 "검은 물 쌀"에 대한 글들이 올라왔다. 구매한 쌀을 씻었는데 뽀얀 물이 아닌 검은 물이 나와 깜짝 놀라 버렸다는 내용들이었다. 한 두 명이 아니었고 나도 그 당시 쌀을 구매했던 지라 바로 쌀을 씻어보았다.
맘카페의 글 내용은 사실이었다. 씻어도 씻어도 쌀에서는 계속 탁한 물이 나왔고 그걸 보던 엄마는 "곰팡이 핀 오래된 묵은 쌀인가보다. 갖다버려라"라고 하셨다.
<임산부 친환경 농산물 지원사업> 사이트에 검은 쌀에 대한 리뷰를 남기면, 해당 리뷰가 삭제된다는 얘기도 돌았다.
제품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리뷰를 남기면 업체가 죄다 '비밀글'로 비공개 처리해버렸던 것이다.
문제를 은폐하려하는 위탁업체인지 공공기관의 행태에 뚜껑이 열렸고, 나는 육아를 하던 와중에 제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기자님은 기사화만 해 주세요.
소스는 제가 다 드립니다
제보메일을 쓸 때의 내 원칙이다. 기자가 해당 사안에 대해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최대한 상세하게, 많은 사례를 담아 제보메일을 쓰는 것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기자가 최소한의 취재만 가지고도 기사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왠만한 내용을 다 전달한다.
내가 기자였을 때 받아본 제보메일들의 특징을 알기에(감정적으로 호소하지만 팩트는 없고, 기자들이 취재하기 어렵게(접근하기 어렵게) 써진 것들), 기자에게 떠먹여준다는 자세로 사업 담당자 연락처며 맘카페 글 링크, 캡처, 사진 등등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보 메일을 쓸 때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한 통의 메일로 기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므로.
결국 해당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서 보도가 되었다. 방송기자가 집으로 찾아와 내 인터뷰도 따 갔다.
이전에도 기사 제보를 한 적은 있었지만 애를 낳고 나니 내가 살고 있는 주변환경에 대한 것들이 기민하게 눈에 들어왔다. 몇 년째 밟을 때마다 울렁울렁대며 흔들리는 보도블럭이라거나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 바로 옆에 지자체가 게이트볼장을 기습적으로 설치하는 것을 알게될 때면 나는 내 시간과 돈(전화비)을 써 가며 민원을 넣었다.
문제점을 얘기하고 개선을 요구해보지만, 일반 시민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경청해주는 공무원은 없다. 대부분은 귀찮다는 태도로 일관하거나 시의 입장만 펼쳐놓는다.
그래서 나는 기자의 힘을 빌린다. "취재가 시작되자"라는 마법의 문구가 공무원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을 알기에 안면도 없는 기자들에게 제보 메일을 쓴다.
내가 보낸 수많은 제보메일들의 수신확인을 클릭해보면 '읽지않음'으로 뜬다. 기자가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메일들은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읽지않음'으로 영영 남는다.
그런데 개중에 꼭 하나 정도는 '읽음' 처리가 되어있다. 그리고 기자로부터 회신이 온다. 취재해보겠다는 답신이거나 추가 취재에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는 메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기자로부터 '기사화되었습니다. 링크 보내드립니다'의 내용이 담긴 메일을 받는다. 그 메일을 받을 때면 시간을 들여 제보한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제보 메일을 쓴다.
제발 내가 제보메일을 안 쓰는 순간이 오길 바라며.
+ 올해 아파트 회장이 되니 공무원들이 이야기를 참 잘 들어준다. 아파트 회장임을 안 밝히고 민원이나 문의전화를 할 때는 10점 척도에 5 정도의 반응이었다면, 아파트 회장임을 밝히고 연락처를 남기니 9~10 정도의 반응으로 돌아온다. 역시 아파트 회장 정도는 되어야 공무원이랑 소통이 되는구나.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