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never, neverland
동화 피터 팬은 피터 팬이 웬디와 동생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자신은 영원히 소년으로 남기 위해 네버랜드로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나는 이 장면 속 피터 팬을 부러워했다.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있는 네버랜드. 나도 피터 팬을 따라서 네버랜드에 숨고 싶었다. 무엇을 피해 숨고 싶었냐면 그것은 점점 내게 오고 있는 ‘어른’이라는 단어였다.
교복을 입은 내게 주위 어른들은 비슷한 말을 종종 했다. “아유, 나도 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학생이었음에도 이 말에 공감했다. 나는 올이 다 풀려가는 학생이라는 옷을 계속 입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나와 반대로 내 친구들은 얼른 어른이 되어 ‘이거 안 돼, 저거 안 돼’로 가득한 학교생활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아마 자유를 바랐기에 그랬을 것이다. 물론 나도 학교의 여러 교칙은 불편했다. 특히 맑으나, 비가 오나 단화를 항상 신어야 한다는 게(내 고등학교는 운동화 대신 단화를 신어야 했다) 그랬다. 하지만 이게 어른의 삶에 비할 바가 되지는 않는다고 느꼈다.
나는 당시 법적인 성인이 되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갓 스무 살이 된 사람부터는 다 어른이라고 봤다. 내가 어른이라고 정의한 사람들은 대단하기도 불쌍하기도 했다. 각자 맡은 바를 해내며 삶의 숙련도를 쌓는 것은 멋져 보였다. 하지만 어른으로서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책임을 매일같이 지고 가는 것은 힘든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자격도 충분치 않은 것 같은데 단순히 나이가 찼다고 ‘어른’이라는 이름표를 내 가슴팍에 달고 다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이름표와 함께 주어지는 그 책임감이 무서웠다. 내가 과연 갈수록 무거워질 책임을 무사히 안고 갈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에서 나는 더욱 네버랜드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지금도 네버랜드에 닿길 소망한다는 거야?’ 아니, 아니다. 네버랜드는 없다. 그것은 원래 알고 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불안한 내 마음의 도피처가 필요했고, 그곳이 네버랜드라면 적당하다고 믿은 것이다. 내가 어른으로 봤던 나이를 요 몇 년 지나오면서는 오히려 지금은 괜찮은 어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지난 몇 년 사이에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정의가 좀 달라졌기 때문이다. 성인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되는 것이지만, ‘어른’은 나이뿐만 아니라 쌓아온 삶의 성숙함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리고 두른 성숙함을 풀어 남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스스로 보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먹는다고 ‘짜잔, 어른이 되었습니다!’ 같은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당장 주변을 둘러봐도 괜찮은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른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내가 어른이라는 단어에 불안함을 느끼던 때에 지금의 내 나이는 상당한 ‘어른’으로 느껴졌지만, 솔직하게 지금의 나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인 상태도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했고 내가 생각하는 어른도 아니고 어정쩡한 상태에 나는 놓여있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과도기의 인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도 감히 이렇다고 생각한다. 분명 아이는 아닌데 자신을 어른으로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회에서는 ‘어른 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반대로 자신은 어른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어른답지 않은 사람도 많다. 무례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 부드러운 어투를 빙자해 모욕하는 사람, 상대방보다 나이가 더 많으니 제 생각이 절대적인 정답이라고 여기는 사람, 배울 수 있음에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는 식의 태도를 지닌 사람. 더 나열할 수 있지만, 끝도 없을 테니 그만하는 것이 낫겠다. 이들을 보면 오히려 나이가 들었는데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옳다고 떼쓰는 행동이나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흔히 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이 아닌가. 이들은 삶의 성숙함을 차곡차곡 쌓지 못하고 다 내던졌음이 분명하다 자신을 두르는 성숙함이 없으니 이렇게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렇다면 삶의 성숙함을 쌓은 사람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 답을 내리고자 공책에 하나씩 써 내렸다. 꽤 여러 가지가 떠올랐는데 생각을 줄이자면 이 정도다.
<어른은,>
1. 자신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 필요한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고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
3. 감정을 속이지 않되 그것을 부드럽게 풀어낼 줄 안다.
4. 정말 좋은 것과 좋은 척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
5. 1, 2, 3, 4를 모두 갖추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러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다. 1번에서 4번까지 모두 갖춘다면 좋겠지만 삶에서 이 모두를 이루며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최소한 어른이 되기 위한 노력 정도는 꾸준히 해야 하지 않을까. 네버랜드(Neverland)는 그 이름처럼 정말 없는 땅이니 우리는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없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몇십 년의 이 길고 긴 과도기에서 어른이 되기 위한 노력마저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눈살 찌푸리게 되는 성숙함이 벌거벗어진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한 해, 한 해를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쌓아 두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한 해를 산 내 삶에서 성숙함을 실처럼 길게 뽑아내서 하나의 망토로 뜨개질하는 연습을 하며 결국 완성될 망토를 꿈꾸는 것이다. 그 망토는 내가 가고 싶었던 네버랜드에 나를 데려다줄 수는 없겠지만 현실에서 내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되게끔 만들어 주는 좋은 옷감이 될 것이다. 옷이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만큼 노력해서 망토를 짰다면 내게 그만큼의 성숙함이 쌓인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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