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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Oct 18. 2020

추억 없이 못 사는 사람 1

일기로 도서관을 만들었어요.



 나는 책상과 책장 정리를 그리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 ‘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질러져 있는 것을 보면 대청소를 시작한다. 그러면 몇 시간을 꼬박 책상 정리에만 쏟는다. 사람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정리를 하면 책상이나 책장에 여유가 생기고 깔끔해지는 모습을 기대하지만 나는 ‘청소 전보다 조금 나은 상태’가 되길 바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책장에는 각종 일기장과 일정을 기록했던 다이어리 그리고 편지가 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내가 내어준 자리라 정리를 해도 정리한 모양이 안 나오는 것에 불평할 수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물건 버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내 손이 조금만 닿아도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고 의미가 들어간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곧 내 추억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별 것을 다 모았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딱지나 유리구슬, 초등학교 때 쓰던 교과서와 공책, 시험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샀었던 아바타 스티커. 이런 것들을 책상과 책장 곳곳에 쌓아뒀었다. 그렇게 모은 것이 책상에서 넘칠 것 같으면 나는 정리를 했고 그나마 정리하고 남은 것이 일기장과 편지들이다. 이 둘은 몇 번의 대정리에서도 ‘버리지 않을 것’에 들어갔다. 손만 닿은 물건도 못 버렸는데 일기는 내가 직접 썼고, 편지는 내 친구가 직접 준 것이니 아마 그것은 버리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평생을 함께할 것들이라면 이야기도 각자 하는 편이 낫겠다.




 47권, 일기장을 비롯해 내 과거의 하루를 모두 기록한 것의 양이다. 한 번도 실제로 세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직접 세어보니 꽤 많아 보인다. 그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부산과 경남에서만 쓴다는 충효 일기, 문방구에서 샀던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열쇠가 없어져 지금은 자물쇠를 끊어버렸다.), 짧은 일정을 쓰던 달력같이 생긴 다이어리, 스티커며 사진이며 많이 붙여서 부풀어 오른 일기장. 종류도 양도 많고 더 늘어난다고 생각하니까 앞으로의 책상 정리가 걱정되지만, 이들을 보고 있으면 꼭 나라는 사람의 작은 도서관이 생기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이 도서관의 백미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썼던 일기장이다. 이때 썼던 일기를 살펴보면 꼭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와 별개의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 일기를 썼던 아이가 내가 된 것이 아니라, ‘어린 나’는 영원히 일기장에 머물고 지금의 나는 이대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이유는 아마 지금 내게는 조금 부족한 솔직함과 순수함이 어린 시절 내게는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를 읽다 보면 깜짝, 깜짝 놀란다. 선생님께 검사를 받는 일기에 ‘난 일기 쓰기가 정말 싫다.’ 적기도 했고 할머니께서 아빠에게만 삼계탕을 사다 주셨다는 날에는 섭섭함을 이야기하다가 끝에 ‘하긴, 아빠도 힘을 내야지 열심히 일한다’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선생님께서 검사하시는 일기에 당당히 일기를 쓰기 싫다고 한 것이나 고작 9살의 나이에 아빠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 참 대단하기도 웃음이 나기도 한다.

 또 이 시절 일기를 읽다 보면 어린 시인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국어 시간을 거치며 시는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시집을 잘 사지도 않고 읽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 어린 나는 마치 시인처럼 정말 시나 노래를 만들어 일기에 적기도 했고 시 같은 표현을 쓰기를 즐겼다. “고구마, 고구마. 예쁜 고구마도 있지만 못생긴 고구마가 맛나요.” 짧은 몇 글자의 시를 써 고구마에 대한 사랑을 말했다. 다른 날에는 바닷가는 아직 쌀쌀해 봄이 안 온 것 같은데 파도는 잔잔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바닷물은 봄이 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린 시인의 순수한 사랑과 시선에 스스로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일기를 읽으며 시를 즐기던 마음과 순수한 시선이 지금 내게 다시 옮겨왔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작은 손으로 써낸 어린 날 추억에는 커버린 내게서 자리를 잃어 밀려난 감정과 생각이 추억 속 검은 글씨로 머무른다. 그래서 필요한 책이 있을 때 그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가는 것처럼 나는 내게서 사라진 감정이 필요할 때 이따금 내 작은 도서관에서 일기를 펼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필요한 감정을 추억에서 빌리며 산다. 하지만 빌린 것은 정말 빌린 것일 뿐이라 내가 가질 수 없다. 그러니 일기장 하나, 하나를 버릴 수가 없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시 열어봐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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