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희 Oct 24. 2020

취미 좀 흔하면 어때요?

흔한 건 모두가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얼마 전 유튜브에서 광고 하나를 보게 됐다. 특이한 것 없는 평범한 광고였는데 광고에 등장하던 단 하나의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음악: 모두가 좋아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단 하나의 취향”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예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음악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음악을 틀림없이 좋아하고 즐긴다. 사람들에게 취미가 무엇이냐 물을 때 가장 흔한 답이 ‘음악 감상’이나 ‘노래 듣기’니 증명할 것도 없다. 나는 이런 대답이 딱히 취미라고 할 게 없어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정말 자주 접하고 사랑하는 것이 음악이나 노래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또한 음악 감상과 노래 듣기를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요를 좋아했다. 초등학생 무렵, 나는 제조사도 어딘지 기억 안 나는 MP3(요즘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한 십 년 전에는 핸드폰보다 MP3에 노래를 담아서 많이 들었다)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아마 엄마가 누가 쓰던 것을 받아왔던 것 같다. 사촌 언니 M은 MP3에 노래를 넣어줄 테니 듣고 싶은 노래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나는 몇 가지 말했는데 M 언니는 별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무슨 어린애가 가요만 좋아해?” 나는 어린애가 가요 듣는 게 뭐가 이상한가 싶어서 “나는 이 노래가 좋으니까, 이거 넣어줘.”라고 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취향을 굽히지 않는 건 변함이 없다. 아무튼, 며칠 뒤 M 언니는 내게 MP3를 건넸다.

 몇 곡 안 되는 노래 중에 유독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 유행하던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다. 나는 이 노래를 MP3를 통해 듣고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이별 노래의 절절함을 초등학생이 이해했을 리는 없고, 순전히 백지영이라는 가수의 가창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래 후반에 감정을 토하듯 부르는 부분이 되면 내 팔뚝은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이 경험은 내게 꽤 큰 충격이었다. 무언가를 듣거나 보고 팔에 닭살이 돋은 최초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노래는 제쳐두고 계속 ‘총 맞은 것처럼’만 질리게 들었다.




 처음 받았던 음악에 대한 충격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잔물결처럼 남아있다가 내 취향에 명중하는 노래를 들으면 다시 몸을 부풀려 넘실거리는 파도가 된다. 나는 그 파도를 타고 기분 좋게 서핑을 한참 타기도 하지만, 가끔 파도가 내 눈까지 올라올 때는 가만히 앉아서 짠물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음악을 듣고 우는 일을 즐긴다. 예전에는 대학교에서 에세이 과제로 이것에 대해 적으며 좀 변태 같지만, 감정을 흘려보내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정말 음악을 들으며 펑펑 울고 나면 비염 때문에 코는 막힐지라도 속은 편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슬픈 선율을 찾아 듣던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냥 슬픈 것보다는 지금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가사를 지닌 노래, 나를 안아주는 듯한 노래가 속에서 더 큰 파도를 만든다.


 큰 파도를 만드는 노래라고 하니 몇 개가 생각난다. 나를 울리는 노래를 조금 소개하자면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있다. 무려 7년 전 노래인데 이 노래는 처음 듣던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왈칵 눈물이 솟는다. 어느 정도냐면 몇 달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우림이 나와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봤는데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이 나와서 끝날 때까지 계속 울었다. 그때는 슬픈 일이 있지도 않았는데도 눈물이 멎지 않아서 같이 있던 사촌 언니 J가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지나버린 청춘에 대해 노래한다. 이 노래도 노래지만 뮤직비디오가 참 인상적이다. 젊고 평범한 회사원이 주인공인데 그는 스스로 시시하다고 여긴다. 칸막이 쳐진 공간에서 항상 반복되는 삶을 사는 사람. 처음 이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 나는 주인공이 내 미래가 될 것 같아 슬펐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삶, 꿈꾸는 것을 사치로 여기는 삶,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한 삶. 당시 나는 진로 문제로 속이 짓무르던 때여서 이대로 가면 나는 정말 스스로 시시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어렸을 때는 이것, 저것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아이가 아무것도 못 하겠다는 말밖에는 뱉어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게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여전한 문제라 이 노래를 들으면 내 속 깊은 곳에 불안과 슬픔을 대신 노래해주는 것 같아 눈물이 난다.


 다른 하나는 최근 알게 된 ‘희야’라는 노래다. 정식 발매된 곡은 아니고 사운드 클라우드라는 음악 플랫폼에 uooooo_j라는 아티스트가 올린 곡이다. 사운드 클라우드를 자주 이용하는 편은 아닌데 몇 달 전 오랜만에 들어갔다가 ‘희야’라는 제목이 눈에 띄어 들어봤다. ‘희야’라고 하면 보통 이승철의 ‘희야’를 떠올릴 테지만, 내게 ‘희야’는 아명처럼 집에서 불리는 이름이다. 내 이름 끝 자도 ‘희’라서 들어가서 종종 이름보다는 ‘희야’하고 불린다. 그래서 제목을 보고는 ‘내 이름이랑 똑같네’ 하며 호기심에 들어본 것이다. 결과는 눈물바람이었다.

 나는 속 깊은 곳이 너무 어둡고 축축해서 열어서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이다. 속을 다 드러내 놓으면 주위 사람이 모두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상 있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도 검고 축축한 곳에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드러내기보다 그곳까지 가는 문을 수십, 수백 개를 만들어 놓고 혼자 품고 가끔 그곳에 들어간다. 그리고 온몸이 새까맣게 젖어 무거워지면 그제야 미적미적 나온다. 그런데 이 노래는 까맣게 물든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안아줬다. 그 품이 너무 따뜻한 것이어서 나는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목소리에 안겨 울기만 했다. 그렇게 한낮의 햇볕 같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너는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그러니 우리 함께 걸으며 살아가자고 하는데 어떻게 그 품을 마다하겠는가. 어쩌면 이 노래 제목이 ‘희야’인 것도 내 눈에 띄게 된 것도 우연보다는 운명이었다고 믿고 싶다.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음악은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한다. 허전한 공간을 채우며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공감을 끌어내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기도 한다. 게다가 따뜻한 포옹까지. 그러니 특별한 취미를 억지로 만들 필요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노래 몇 곡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담 오늘은 꼭 그 노래를 듣길, 아니면 위의 두 노래를 찾아서 들어봐도 괜찮다. 노래는 같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는 다른 사람이라서 다른 높이와 폭의 감정을 지닐 테니까. 각자 다른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이 특별한 취미를 즐겼으면 좋겠다.




커버 이미지 출처: Photo by Emma Frances Logan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추억 없이 못 사는 사람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