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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Oct 25. 2020

추억 없이 못 사는 사람 2

편지에 담긴 마음은 영원한 것



 살면서 편지를 몇 통이나 주고받을까? 직접 손으로 쓴 편지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요즘은 과거에 비해 참 많이 줄었겠다. 이제는 생일에도 손편지보다는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를 이용해서 축하를 전한다. 그게 훨씬 빠르고 간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방법이니까. 나도 메신저를 이용해 축하할 일이나 걱정스러운 마음을 전달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에 꾹꾹 눌러쓴 글씨가 좋다. 그래서 종종 편지지를 사 모으고 편지를 쓴다. 또, 불투명한 다용도 상자에 ‘추억 상자’라는 멋없는 이름을 붙이고는 내가 받았던 편지들을 가득 모아놓고 보물 상자처럼 여긴다.

 추억 상자 속 색색의 편지들을 한참 봤다. 내가 색색의 편지들을 버리지도 않고 모아두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 물었다. 이 글과 이어지는 이전 글에서는 단순히 ‘친구가 준 거라서, 추억이라서 모으는 거야’라고 했지만, 어딘지 개운치 못하다. 나는 이 상자 속 편지를 일기와 더불어 ‘집에 불나면 가지고 나가야 하는 것’ 1순위로 달아두었으니 뭔가 더 이유가 있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모아둔 일기장들은 도서관이라는 멋진 이름도 달아줬는데 상자 안에 겹겹이 쌓여있는 편지들도 뭔가 이름을 붙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 마음이네. 마음 말고는 알맞은 말이 없다.” 편지 봉투나 편지지가 색색으로 모여있으니 꽃밭이라고 해줄까, 글씨로 만든 앨범이라고 할까. 몇 개가 떠올랐지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억지로 이름을 붙이려니 자꾸 거창하게만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올여름 일이 떠올랐고 내가 받은 편지들은 꽃밭도 앨범도 아니고 그냥 그들의 마음이구나 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찌는 여름에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포항을 갔다. 친구 생일 선물을 직접 전해주겠다는 내 고집 때문이었다. 친구에게 선물을 건네주니 친구도 내게 줄 게 있다며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내 앞에 비즈 반지를 여러 개 내밀었다. 나를 주려고 만들었는데 내 손가락 둘레를 몰라서 여러 개를 만들었다면서. 너무 귀여운 선물이었다. 나 준다고 손톱보다 훨씬 작은 구슬을 꿰고 줄을 묶어가며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그저 즐거운 웃음만 났다. 저녁에 부산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도 내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친구의 마음을 느꼈다.

 “네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아, 어떡해. 정말 미안해.” 반지는 사라졌다. 잠깐 빼놓는다는 것이 도대체 온 집을 뒤져도 안 보였다.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뒤졌는데도 연두색 반지는 보이질 않았다. 얼마나 덜렁거리면 소중하다고 생각한 반지를 잃어버리는가. 그것도 어제 받은 걸! 나는 이 사실을 친구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태연하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친구에게 메신저로 사과를 했다.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에 친구 목소리를 들으며 사과하기가 겁났다. 그래서 전화 대신 메신저를 택했다(이럴 때는 메신저가 좋구나). 친구가 나를 생각하며 만들었을 시간과 정성이 모조리 날아간 기분이었다. 나는 그 귀여운 마음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사람이 됐다.


 편지가 그때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마음과 같은 것이다. 편지지와 봉투를 고민 끝에 고르고, 해주고 싶은 말을 보기 좋게 차곡차곡 정리해서 글씨에 담아내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 편지를 전해 줄 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게 한 사람에 대한 마음이 된다. 그러니 내게 닿은 편지들은 단순히 추억거리가 아니라 그때 그들이 내게 준 마음이다.


 편지에 담긴 마음은 영원하다. 내게 편지를 쓴 사람들이 비록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고 사이가 틀어져 멀어졌을지라도 내게 줬던 그 편지에는 분명 그때 나를 생각하던 마음이 담겨있다. ‘오랫동안 친구 하자’, ‘네가 제일 친한 친구야’ 그리고 편지에 적힌 여러 약속이 그때는 모두 순수하게 반짝였던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그 오래된 편지들을 하나씩 꺼내서 읽다 보면 그들이 편지를 쓰며 턱을 괴고 뭘 쓰나 고민했을 모습이 피어 나와 내 입꼬리를 간지럽힌다. 그 간질거림이 좋아서 추억 상자를 한 번 열면 꽤 오랫동안 엉덩이가 땅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렇게 가만 앉아서 ‘나를 사랑해줬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하고 다시 그때의 마음들을 느낀다. 지금도 온기를 지닌 이 마음들로 그때의 나는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불투명한 상자에 담긴 온기들을 읽어나가며 살아간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써줬던 편지들은 어디에 있을까. 내 편지를 받았던 사람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 그 사람의 추억 상자 속에서 온기를 품고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는 잃어버리기도 했겠고 그냥 버려지기도 했겠다. 그래도 이왕이면 많은 사람이 간직해줬으면 하는 바람. 당신들의 편지가 내게 살아갈 온기가 되니, 내가 눌러쓴 마음도 당신들에게 살아갈 온기가 되었으면 한다.




커버 이미지 출처: Photo by Joanna Kosinsk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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