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들
"네? 그.. 그럼 저 분이 마들란의 동생이란 말인가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오늘이 바로 그녀의 장례식이라면 어쩌면 제정신이 아니어야하거나 적어도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서 더 이상의 미련이나 아쉬움이 없거나 혹은 그런 것들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아서 일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무슨 말을 해드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지금 매우 힘들거나 슬프겠다는 생각과 해질녁 호숫가에서 슬픈 표정으로 먼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던 그 모습이 차차 이해 될 뿐이었다.
"네, 지병이 있었지만 그래도 눈을 감는 순간까지 행복한 모습으로 살다가 갔어요. 원한다면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 수 도 있었지만 그 아인 여기서 눈을 감길 원했어요.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은 없었다고도 했죠."
식사를 거의 마친 그녀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어줍짢은 위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도 잘 몰랐다.
"너무 상심마세요. 아마도 동생분, 그러니까 사브리나는 지금쯤 저 하늘의 별이 되어있을거예요."
아, 젠장. 이런 유치한 말을 또 내뱉다니.. 난 왜 종종 이런 상투적인 말만 늘어놓는 걸까.
"호호. 고마워요. 재밌는 발상이네요. 저 하늘의 별이 된다라.. 하긴 그것도 일리가 있어요. 그런 일이 과거에는 자주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지금쯤 사브리나는 저 우주보다 더 먼 곳에 가 있을거예요. 언젠가는 저도 갈 곳이기도 하죠."
"아니, 아직 이렇게 정정하시고 활기가 넘치시는데 어딜가시려구요. 그런 생각하지마세요."
나는 뭔가 더욱 세련되면서도 진부하지않은 표현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별다른 말이 생각나지않았던 것도 내가 상투적인 표현들을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제가 사브리나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거예요. 사브리나는 자신의 삶을 100% 이상 살다 간 아이였어요. 그녀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댄서였죠. 가끔은 전사이기도 했구요. 종종 그림을 그녀 갤러리에 전시를 하기도 했고 날씨가 좋은 날엔 광장에서 연주를 하며 삶의 순간순간을 즐기다 갔어요."
마들란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브리나는 참 다재다능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매월 돈을 벌어야한다는 사고에 사로잡힌 나에겐 그저 꿈과 같이 느껴질 뿐 그 삶이 정답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림도 그리고 미숙하지만 작곡과 비슷한 것도 했으며 소설연재도 하고 책을 내기도 했지만 이는 거의 모두 돈이 안되는 일 일뿐이었다. 그 일을 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마음이 편하면서 동시에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 발산하는 기분이 들어 때로는 상쾌한 기분 마저 들었지만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아무래도 돈에 사로잡혀 있는것 같았다. 돈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걸 떨쳐버릴순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혹시 사브리나는 혼자 살았나요? 이런 질문은 고인에게 실례인건 알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있었다면 사브리나의 남편 분이나 사브리나가 돈을 벌면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부분이 제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결국, 돈을 못 벌면 제 아무리 가치있는 일도 무의미하다고 세상은 말하니까요."
마들란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보면 살짝 웃는 듯 하기도 했는데 눈빛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미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순간 내가 말을 잘 못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도 속물이거나 돈만 밝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돈을 추구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들다. 먼 미래를 바라보면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당연히 우리가 선택해야할 길이 맞지만, 현실에서는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지않으면 어리석은 인간이 되는게 오히려 당연했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은 배부른 돼지가 되는 길을 찾다 지친 나머지 여기로 도망쳐왔던 것이다.
"사브리나에겐 먼저 하늘로 간 남편이 있었고 현재 장성한 세 자녀가 있어요. 사브리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죠. 그러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열정적으로 즐겼던 거예요. 제가 보기엔 태주씨도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걸 해나가는 중인 것 같은데요?"
그런가? 내가?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나오니 월급은 끊기고 그 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조금 떼어내 도망치듯 현실로부터 달아나왔는데.. 이것도 그 과정 중 하나란 말인건가?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 말이 완전히 와닿지는 않았다. 취미생활은 그저 취미일 뿐이었다. 취미를 일로 발전시켜 돈까지 벌면 좋겠지만 그 순간 취미는 취미가 아닌게 되어버린다. 취미는 취미일 때 아름답다. 의식적으로 행하며 목적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취미는 노동일 뿐. 노동은 언제나 괴롭다. 뭐, 적당한 노동은 신성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이지만 정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노동은 고통의 또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다.
"돈은 사업을 통해서 벌고 싶고, 글쓰기와 다른 취미들은 그냥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좋겠다는게 제 결론이예요. 전혀 감동적이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는 한 청년의 넋두리일 뿐이죠. 하긴..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알겠어요. 태주씨, 지금은 아무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쉬어요. 정말 아무런 고민도 걱정도 하지말구요. 지금 태주씨에겐 방법이 필요한게 아니예요. 태주씨는 동기가 필요해요. 태주씨를 저절로 움직이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한 거죠. 돈버는 방법이요? 그건 시간이 도와주는 것이지 태주씨가 찾아나서는게 아니예요. 태주씨는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면 되요. 여기서 제일 중요한건 꾸준함이지 특별함이 아니란 점만 기억해요."
동기라.. 하긴 나는 지금 내가 하고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을 꾸준히 진행할 원천이 바닥난 느낌을 종종 받았다. 순간순간마다 그걸 느꼈다는건 아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 예전보다 덜 열정적이고 덜 부지런하며 덜 즐거웠고, 오히려 현실이 더 두려웠고 새로운 일에는 더 막막했으며 무엇보다 이대로 가다간 돈을 벌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에 더 겁이 났던 것이다.
"태주씨,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여기까지 얘기하기로 해요. 무엇보다 많이 쉬고 놀면서 에너지를 충전해야하는데 여기서 저랑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 아쉽지않겠어요? 이왕 해외로 놀러나왔는데 태주씨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새로운 열정도 느껴봐야죠. 하하."
마들란은 얼굴에 화사하면서도 인정이 가득한 웃음을 띠었다. 그래, 내가 무슨 기대를 한 걸까?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게서 돈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늘이 내린 방법이라도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다면 그 역시 어리석은 생각일 뿐. 나는 그녀의 말대로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바보같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룬 사람에겐 성공으로 걸어온 길이 뿌듯하고 쉽게 보일 수 있지만 그 길을 걸어가야하는 사람에겐 온몸이 젖은 채 비내리는 밤안개속 터널을 찾아 헤매는 배고픈 현실일 뿐이란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