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들
그땐 아마도 새벽이었던것 같아.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새들의 노래 소리에 잠에서 깼어.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는데 상쾌한 느낌이 들더군. 그런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새벽은 뭔가 또 다른 특별한 경험이었는데 대자연속에서의 아침이라 참 들뜨기도 했지. 그런데 그 순간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거야. 그건 아마 대자연 깊숙한 곳에서 사는 그들에게는 매일 펼쳐지는 익숙한 과정 중 하나겠지만 나에겐 마치 비밀스런 우주의 한 단면을 발견한 것과 같은 짜릿함이었어.
막 어스름이 걷히면서 나무들 사이로 새파란 하늘빛이 물들면서 투명한 빛을 내리쬐는데 그 아래에 사슴, 아마 숫컷 사슴인 것 같아,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는 새벽을 향해 인사라도 하듯이 한참을 그대로 서 있는 거야. 그런데 그 모습이 정말 걸작이었어. 하얀 꽃인지 반딧불이 인지도 모를 반짝이는 것들이 들판에 지천으로 흐드러져 있었고 사방은 천천히 밝아오는 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거든. 그리고 그 사슴은 여전히 미동도 않은 채로 허공에 코를 들고 뭔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처럼 혹은 새벽과 아침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순간을 느끼며 미지의 우주와 교신이라도 하는 듯이 아무튼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어.
완벽한 순간이었지. 그저 황홀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모자란 그런 순간이었어. 이게 바로 신이 빚은 감동의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야, 이런 감동의 순간은 매일, 매번,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거든 그냥 우리가 바빠서 못보고, 봐도 모르고, 그 느낌을 잊은 것 뿐이야. 아무튼 그 순간 만큼은 대자연의 모든 것들이 우주와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물론, 대지와 숲은 금새 노란 햇살에 물들며 제 색깔을 찾기 시작했고 짙은 파란 하늘이 삽시간에 온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지.
자, 그렇게 아침이 되었고 이렇게 너에게 또 두번째 이메일을 보내는 구나. 바쁘지만 내가 보내는 이런 글들은 잘 읽어서 넌 나처럼 방황하는 30대를 보내지않길 바래. 뭐, 이런것도 꼰대의 참견처럼 보이려나? 여튼 돌아가면 또 얘기하자, 밥도 먹고.
그럼 이만 안녕, J.
TJ가.
마들란과의 대화 때문에 쉽사리 잠을 못이루다 겨우 잠든 나는 아침이 밝기도 전에 엄청난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 지역에서는 제법 좋은 침실이 곧바로 숲과 연결된 방에서 묶은 나는 아주 운이 좋게도 살면서 몇 번 보기 힘든 평화로운 광경을 내 침실에 누워 지켜볼 수 있었다. 사슴으로 보이는 그 숫컷은 진작에 사라졌지만 내 가슴엔 감동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이 황홀감을 혼자 느끼기엔 너무나 아쉬워 친한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을 보내고나서 다시 읽어보니 좀 낯간지럽긴했지만 이것 역시 내 삶의 역사이고 진귀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그 감정을 숨지기는 않은 걸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어제 밤 생추어리에서의 일은 정말 독특했어. 답을 얻은 건 없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편안했으니까.. 그런데 그러고보니 급하게 나오느라 연락처하나 받지 못했네. 어차피 여기서 10일 이상은 머물텐데.. 다시 한 번 찾아가볼까?'
레스토랑으로 내려가자 2미터가 넘는 창가의 대형 유리들을 통해 밝은 햇살이 쏟아져들어와 그 곳을 가득채우고 있었다. 구운 식빵 두 조각과 버터, 딸기잼 그리고 샐러드와 스크램블 에그를 쟁반에 덜어서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창 밖으로는 호수가 보였는데 마치 바닷가와 같은 풍경과 어선들 덕분에 해안가에서의 아침을 맞이하는 듯한 기분 마저 들었다. 따뜻한 양송이 스프는 나의 빈 속을 부드럽게 채워주었고 식후에 들이킨 따뜻한 드립커피는 입안에 향긋함을 남기며 만족스러운 아침을 마무리해 주었다. 이런 기분이 들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삶의 행복은 거창한 계획이나 수 천 억의 금은보화에서만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말 간소하게 살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사실 어디에나 있으니 말이다.
노트북 배터리를 충전하고 휴대폰과 보조배터리까지 다 챙긴 뒤 서둘러 호텔방을 빠져나온 나는 잰걸음으로 로비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 호텔에서 꽤 좋은 방에서 묶고 있는 덕분인지 매니저가 나를 보더니 한걸음에 달려와서는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질문을 하려는 걸 빠르게 답을 하고는 정문을 빠져나왔다. 꽤 좋은 방에서 묶는다는 점에서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리 말해두지만 이번 여행만큼은 여태껏 한 번도 호텔의 좋은 방에서 투숙을 해보지않은 과거의 나와, 9년 가까이 돈을 벌면서도 나를 위해 사치를 부려본 적이 없었던 과거의 나를 위해 딱 10일만 좋은 곳에서 살아보자는 일종의 보상심리에 근거해 꽤 괜찮은 방을 구한 것이다. 돈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오늘 새벽의 특별한 경험 덕분에 이제 그런 잡생각은 전혀하지 않기로 했다.
호수의 이름을 딴 아티틀란 시장을 가로질러 마들란을 만났던 호숫가를 지나 생추어리로 걸어갔던 길을 기억하며 한참을 걸어갔다. 분명 이 정도 거리에서 골목을 몇 개 지나 생추어리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는데, 골목들을 몇 번 이나 지났갔지만 생추어리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골목이 생추어리와 연결된 골목이 맞는지 확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큰 길로 나와 다시 생추어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생추어리의 큰 나무문 입구는 나오지 않았다. 귀신에라도 홀린건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들란과 나눴던 이야기와 사브리나에게 해 주었던 기도 그리고 식당에서 같이 먹었던 스테이크의 육즙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었고 그 모든게 다 거짓말이고 허상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그녀와 함께 있었기에 내 기억력을 탓했으면 했지 어제 밤 일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어제 그녀와 함께 걸었던 골목을 따라 몇 번을 찾아헤맸지만 생추어리의 문은 커녕 그 커다란 저택의 일부도 보이지 않자 난 환장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생추어리와 연결되어있었던 가장 유력한 골목의 끝에 가서 그 벽을 한참 쳐다보다가 손으로 벽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마들란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는데 역시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행인에게 생추어리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생추어리가 뭔지 조차 몰랐다. 그래서 순간 또 오싹한 상상을 하긴 했지만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고 있었다.
"태주?"
그렇게 한참을 헤매던 중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엔 아니나다를까 마들란이 약간은 놀란 눈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들란! 반가워요. 이렇게 반가울수가, 저 지금 생추어리를 찾느라 이 근처를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요. 아무리 찾아도 생추어리가 안 보이고 아까 행인에게도 물어봤는데 생추어리를 모르길래 난 또 혹시 내가 어제.."
극적으로 마들란을 만난 나는 감격에 젖어 방금전까지 생추어리를 찾느라 얼마나 헤매고 있었는지 한 참 설명했다. 오죽했으면 어제밤 일이 꿈이나 귀신에 홀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생추어리는 매일 문을 열지는 않아요. 어제는 특별한 날이어서 열었었죠. 아침부터 고생하셨겠어요. 자, 잠깐 나를 따라와봐요. 일단, 여길 떠서 큰 길로 나가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