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들
나는 급하게 그 장소를 빠져나가는 마들란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약간은 긴장한듯한 그녀는 몹시 차분했던 어제밤과는 사뭇 달라보였다. 주변을 살피며 앞으로 빠르게 걷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색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한참을 걸어나가자 큰 길이 나왔고 호숫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도시의 풍경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 아침드셔야죠? 태주씨, 뭐 좀 먹고 왔어요?"
골목을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찾지도 못했던 생추어리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던 나는 그녀의 질문에 빠르게 대답하고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네, 호텔 조식이 정말 훌륭하더라구요. 참, 마들란, 그나저나 생추어리는 왜 안 보였어요? 문을 닫나요? 그런데 아예 그 건물을 찾질 못해서요.."
마들란은 또 다시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어깨에 맨 가방을 다시 고쳐 매더니 나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태주씨, 아침을 드셨다면, 잠시 우리 커피 한 잔 할까요?"
출근 시간으로 혼잡했던 큰 도로들은 점점 여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들어간 카페는 이 지역에서 유명한 곳이었는지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여행객인듯 다들 저마다 자기 몸집만한 배낭을 의자나 테이블 곁에 두고 있었고 한 쪽 구석에는 여행용 캐리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마들란은 나에게 일상적인 질문 몇가지를 던지고는 다시 생각에 잠긴 채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난 평소에 잘 마셔보지 못한 리스트레토비안코라는 라떼의 한 종류를 시켰는데 샷을 적어도 3번은 넣었는지 진한 에스프레소 샷이 옅은 우유와 함께 내 몸속에서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처럼 정신을 맑게 만들어 주었다.
"이거 정말 진하네요. 정신이 맑아지는게 상쾌하고 좋은데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마들란의 모습에 나는 억지로 다른 얘기를 꺼내서라도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애를 썼다.
"고민은 좀 해결이 되었나요? 어제 밤엔 저도 좀 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제가 요즘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일하고 살아가는지를 잘 몰라서 미안해요. 게다가 한국은 제가 잘아는 나라도 아니라.."
"아녜요. 어제 마들란이 해준 한 마디를 정말 현실적인 답변이었어요. 제가 정신을 차리는데 도움이 되었거든요. 제 주변의 그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없어요. 가족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조차도 힘드니.. 제 자신에 대해서, 제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남아있는 날들에 대해서 생각을 좀 더 깊게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마들란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어제 밤과 같은 온화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치 방금 전 까지는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방금 막 그녀를 쫓던 어떤 것들이 사라졌을 때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안도의 표정과 비슷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난 커피를 두어모금 더 들이켰다. 맛있었다. 우유가 많이 들어간 라떼도 좋지만 종종 이런 진한 에스프레소에 약간의 우유가 오히려 우유의 고소한 맛과 에스프레소의 쌉쌀한 맛이 어우러져 감칠맛을 냈다.
"최고급 호텔이라 그런지 바로 제 방 앞에 작은 정원이 있어요. 그 정원은 바깥의 숲과 연결이 되어있는데 자연스러운 조경이 정말 예술이거든요. 어제 밤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새벽에 엄청나게 시끄러운 새소리에 잠을 깼는데, 아, 그런데 그 새소리는 예술이었어요. 시끄러운데 기분좋은 소음 같다고 할까요? 아무튼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정원에 아주 큰 뿔을 가진 사슴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밝아오는 새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우와, 그게 참 예술이더라구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 침대에 누워서 그 사슴을 본게 꿈이었는데 아님 새벽에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본 진짜였는지 그게 좀 헷갈려요. 왜냐하면 그 사슴을 좀 더 가까이서 보려고 일어나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그 사이에 사라졌더라구요. 분명 사슴을 본 기억은 진짜인데 새벽에 본 것이라 헷갈리는거죠. 하하. 아무렴 어때요. 그런 생경한 기억이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색다른 경험이 나의 지친 일상을 달래주는 느낌이었음 된거죠."
그런데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웃으며 듣고 있던 마들란이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가 앉은 방향으로 구부리며 낮은 목소리는 묻는 것이었다.
"새벽에 사슴을 보았나요? 큰 뿔을 가졌다고 했죠?"
"네.. 왜 그러세요?"
마들란은 다시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입가의 미소는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눈빛은 다시금 약간 불안해졌고 뭔가 깊은 생각에 다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질문을 퍼부우며 그녀의 낯선 행동들에 대해 물으려했지만 갑자기 그녀가 원래 이상한 사람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그건 정말 아니었다. 그녀가 이상한 사람이 아닌건 확실했다. 다만, 뭔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혼자 생각하고 있었을 뿐.
"태주씨, 태주씨는 정말 재능이 많은 사람이예요. 그러니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하고싶은게 무엇이든지 그냥 꾸준히 하세요. 그저 꾸준히. 그리고 계속해서 그걸 많은 사람들에게 퍼트릴 수 있는 기회들을 만들어요. 그럼 태주씨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을거예요."
뭐지? 분명 좋은 이야기들이긴 한데 왜 갑자기 이런 순간에 저런 이야기를 꺼낸 걸까? 그녀는 마치 급하게 이야기를 끝내기위해 듣기에 좋은 조언으로 마무리하려는 학교의 상담 선생님 같은 말을 하며 나를 달랬다. 이미 그런 글이나 이야기들은 책이나 인터넷에서 많이 보고 들은터라 굳이 나를 달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그 사슴과 눈이 마주쳤나요?"
"네? 아, 아뇨."
이상하다. 이걸 왜 묻지? 난 그냥 대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일상과 만났을 때의 평화로운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사슴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죠?"
"네. 마치 하늘과 우주와 교감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대자연이 우주와 교감하는 걸 본 듯한 느낌이었어요."
"다행이네요. 혹시, 아까 생추어리가 있던 골목 주위에서 어떤 동물들을 보진 않았어요? 가령, 지나가는 개나 혹은 근처를 날아다니는 새같은 거요?"
"아뇨."
동물이라니? 제발, 부디, 마들란이 이상한 사람은 아니길 바랐다. 난 그저 그녀가 아주 멋있게 나이 든 매력적인 여자이고 그런 분에게 연륜이 묻어난 진정한 조언을 얻어서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마들란, 혹시 새벽에 본 사슴이 어떤 문제라도.. 되나요?"
"아니예요. 전혀, 미안해요. 제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들을 해서 놀랐죠? 어제밤에 제가 꾼 꿈이 우연히도 태주씨와 비슷한 꿈이라서 물어본 것 뿐이예요, 호호. 자, 커피를 다 마셨으면 이제 일어날까요? 태주씨는 오늘 일정이 어떻게되요? 전, 한가한 노인이라서 젊은 이의 여행 일정이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