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ker: Folie à deux (2024)
마치 피고인을 세워두고 죄가 있냐 없느냐를 따지듯 <조커: 폴리 아 되>(2024)는 작품성을 두고 대중에게 심판의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속 법정 장면처럼 아서 플렉을 두둔하는 무리와 혐오하는 무리로 갈라져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어요.
전 작품인 <조커>(2019)에서도 똑같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해서 범죄자 미화냐 아니면 예술이냐를 두고 화두에 올랐었는데 얼마전 파리 올림픽에서도 일었던 논쟁처럼 대중들은 예술의 허용 범위에 대해 꽤나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저는 예술을 단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은유’인 것 같습니다. '경복궁 낙서 사건' 처럼 사실 그대로의 정보를 게시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닙니다. 하지만 관찰자가 대상에게 은유적 표현을 느낀다면 그건 예술이 된다고 봅니다. 뱅크시의 그래피티 처럼요.
어떻게 바라보냐도 중요한 지표가 될 것 같습니다. 한 도시를 상상해봅니다. 수 많은 차량들이 도로위를 굴러가고 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지켜봅니다. 누군가는 번호판의 글자가 다 보일정도로 자동차를 가까이 지켜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 다른 한 사람은 전망대 위에 서서 도심을 내려다봅니다. 화려하게 움직이는 불빛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며 분명 예술적이라고 느낄겁니다.
이렇게 실존하는 대상을 멀리 떨어져서 보았을 때 흐릿하거나 작아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은유와 예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커: 폴리 아 되>와 '아서플렉'이라는 인물을 한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가장 먼저 '폴리 아 되(Folie à deux)'라는 이 특이한 네이밍부터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말은 프랑스어로 '공유정신병'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구글번역기를 돌려보면 'Folie(광기) + à(가지다) + deux(둘)'로 두 사람 이상이 가지는 광기라는 뜻입니다.
'조커'라는 캐릭터도 DC코믹스의 미국 캐릭터이고, 연출한 토드 필립스도 미국사람, 조커와 할리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와 레이디가가도 미국사람, 영화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도 미국회사인데 왜 '폴리 아 되(Folie à deux)'라는 프랑스어가 부제로 붙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위키피디아에 검색을 해보니 '폴리 아 되(Folie à deux)'라는 의학 용어가 따로 있더라구요. 19세기 후반즈음부터 프랑스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되었던 정신이상현상이었습니다. 굳이 원래 있던 의학용어를 프랑스어로 번역을해서 표기한 것이 아닌 원어 그 자체였다는거죠.
19세기 후반이면, 프랑스에서 산업혁명이 서서히 일어나며 근대의 도시화가 시작되던 시기인걸 보면 DC코믹스에서 현대의 대도시를 상징하는 것 처럼 보이는 (정확히는 뉴욕이지만) '고담시티'에서 조커가 탄생했다는 설정이 왠지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교도소의 차갑고 축축한 이미지 속에서 간수들에게 일제히 통제당하는 죄수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는 뭔가 <레미제라블>과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떠올랐습니다. 둘 다 프랑스 문학이죠. 또 <조커>(2019)에서도 나왔지만 이번 <조커: 폴리아되>(2024)에서도 장애가 있는 듯한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굽은 등을 보고 있자면 <노트르담의 꼽추>(파리의 노트르담)가 자연스레 떠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언급한 세 작품 모두 소외된 하층민들의 부조리한 당시 사회에 대한 억압을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작품들입니다. 토드 필립스 감독님은 ‘아서 플렉’을 변호하기 위해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닌, 법정 장면을 주 무대로 오를 수 있게 해, 이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프랑스의 이미지를 고담시티로 많이 가져오고 싶었던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조커: 폴리 아 되>는 뮤지컬 영화였습니다. 뮤지컬이란 장르는 고유의 언어와 관습이 있는데, 이는 항상 유쾌하고 희극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똑같이 뮤지컬 영화인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속의 댄서>(2000)는 이런 장르적 관습을 오히려 거꾸로 타서 관객들에게 비극과 허무함을 선사하는 영화인데, <조커: 폴리 아 되> 또한 이런 비슷한 행보를 밟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둠속의 댄서>(2000)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주인공 셀마가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룹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셀마는 여러 사건 속에서 고통에 시달리지만 현실을 도피하듯 보이지도 않는 뮤지컬 영화를 보고, 시종일관 노래를 부릅니다.
'아서 플렉'이 음악 수업에 들어간 후 부터 어울리지도 않는 노래를 계속 불러대는 이유가 바로 그것 입니다.
조커는 고립된 인물입니다. 어둠의 응집체 그 자체 같다고 느꼈습니다. 애니메이션, <다크나이트> 시리즈, <수어사이드 스쿼드>, <배트맨>시리즈 등 그 동안 '조커'라는 캐릭터를 여러 영화에서 묘사했습니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조커를 사회 속 어두운 그늘이라는 인물로 치환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인터뷰, 법정에서의 '아서플렉'을 텔레비전이나 카메라를 통해 프레임속의 프레임의 형태로 계속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아서 플렉'은 카메라 렌즈를 넘어 보이지 않는 시청자들을 자꾸만 응시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아서 플렉'의 변호사는 참으로 따듯해보입니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열심히 편의를 봐주고, 항상 믿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서 플렉'의 키스에는 기겁을 하며 손사레를 치는 모습이 모순 같아 보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백치들>(1998)에서 장애인 흉내를 내는 백치클럽에 진짜 장애인이 오자 혐오를 하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영화를 보고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변호하며 동정하는 대중을 비웃는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을 모여들게 하는 프랑스의 근대 도시화가 공유정신병(Folie à deux)을 만들어냈다면, 조커 시리즈의 배경인 1980년대 텔레비전의 활발한 보급은 대중의 새로운 시선을 창조해냈습니다.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인터넷과 SNS의 파급이 폭팔적으로 사람들과 시선이 몰리게 하며 더욱 밀집되고 엄격해진 대중의 눈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 시점에, 어디선가 새로운 '아서 플렉'이 탄생하고 있는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