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그리고 <맡겨진 소녀>
재 작년, 마리끌레르 영화제를 통해 보았던 <말 없는 소녀>(2022)라는 아일랜드 영화. 개중에 가장 선명한 자국을 남겼던 그 기억력을 잘 간직하고 있던 차, 얼마 전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이라는 작품이 공개되어 반가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두 영화 모두 아일랜드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각각 95분과 98분, 길지 않은 러닝타임을 가진 것 처럼 두 소설 또한 짧다. 104쪽과 132쪽으로 충분히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다.
애써 설명하려 하기 보다 독자의 지력을 믿는 것, 클레어 키건은 말한다. 자칫 지나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은유적 표현들, 이처럼 사소한 것들 그 아래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두 이야기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다지 특별한 가치를 표방하는 것 같진 않다. 수 많은 예술작품에서 묘사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귀를 기울여 보는 것 과연 그 뿐일까. 그렇기 때문에 세상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고 약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기는 무척 어려운 것 이다. 아이린의 굳은 조소처럼 많은 사람들이 선행은 사치와 오지랖이라고 굳게 믿는 원인이다.
그래서 키건의 말 처럼 소설은 독자에게 올바름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을 힘 주어 하지 않는다. 딱 한번 주어진 삶 속에서 우리가 얻어갈 수 있는 문학의 순기능이라 함은 바로 타인의 시선을 공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소비하는 행위는 곧 어휘력과 상통됨을 느낄 수 있다. 집에 사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라며 독백하는 펄롱처럼 어휘를 습득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유약한 통찰력으로 갇힌 생각의 틀을 확장시켜주는 무한한 잠재력이다. 이 은유가 모두 사전을 집에 들여놓기를 소망하는 작은 의미를 가지는 것 이다.
펄롱은 첫 출근한 버섯공장에서 부지런히 땀을 흘리며 애써 버섯을 땄음에도 뒤돌아 시작한 지점을 돌아보니, 새끼버섯들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끊임없이 공전하는 지루한 일상의 궤도에 관성을 깨뜨리는 것은 갑작스럽고 특별히 발생되는 범우주적 사건이 아닐 것 이다. 그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온 존재가 갖고 있는 중력이라는 자연의 힘일지도 모른다.
맡겨진 소녀가 킨셀라 아저씨의 품에 안겨 아빠라고 나지막이 부를 수 있던 것 처럼 펄롱 또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을 품는다. 그는 기계적인 노동에 빠져 회의를 가지고는 과거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일상 속에서 생부가 아닌, 즉 남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따듯한 애정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곤 용기를 얻는다. 되풀이 되는 선행, 그 또한 반복되는 것 아니겠는가. 서로의 손길에서 우리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희미하게 관류하는 사랑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마음의 여진을 남게하는 두 이야기. 곳곳에 드러나 있는 작가의 인장들을 발견하는 기쁨도 존재한다. 문학을 하나의 주제로 개괄하려는 시도 보다 섬세하게 조탁한 이 아름답고 작은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눈에 담는 것. 아로새겨진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쁨. 살아야할 이유가 무엇이 있나 의문이 들 때 미소를 머금고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