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이 사진은 뭐에요?"
주말에 집에 돌러온 꼬마 손님이 공부방에 붙여진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설프게 합성티가 느껴지는 그 사진 속에서 나는 진지한 얼굴로 사인을 하고 있으며, 그런 내 사인을 받는 여자는 아주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 뒤에 플랜카드에 적힌 글은 '올해 최고의 베스트셀러작가, 김여정을 만나다' 였다. 예전에 합성어플을 사용해 만든 이 사진은, 꿈지도에 그렸던 꿈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내 노트북 뒤 벽에 붙어 있다.
"응, 이모가 되고 싶은 모습을 상상해 본 사진이야."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아닌 거에요?"
"지금은 이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지."
상대가 어린 아이일지라도 내 꿈에 대해 말하는 건 살짝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 한 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문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정말 노력하고 있는가?'
사실 나에겐 미루고 미뤄놓은 숙제가 하나 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린 '표지판'이라는 폴더가 그 것이다. 그 안에는 몇 번이고 다듬은 기획안과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써두었던 글들 수십편, 완성되지 못한 샘플글이 들어있다. 올해 3월이 되기 전, 투고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던 흔적들이다. 이미 가까운 지인 몇몇에겐 투고할거라 미리 공언까지 하였지만 아쉽게도 그게 끝이었다. 나는 고군분투하다말고 슬며시 빠져나와 '복직'이라는 허울좋은 핑계를 대며 손을 놓았다. 대신 마음 한 구석에 생긴 찝찝함을 견뎌내야만 했다. 가끔은 투고를 해서 이 찝찝함을 떨쳐버리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좀 더 시간을 갖고 글을 고치고 싶다는 마음에 막혀 영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투고할 글과 전혀 상관없는, 그냥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해진 주제도 없고 하루에 몇 번씩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중 하나를 골라 쓰는 글, 바로 지금 쓰는 글과 같은 글 말이다. 복직 후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새벽 두 시간을 감사히 여기며 글을 써 왔다. 업무로 이른 출근을 하던 날, 몸상태가 좋지 않은 날을 제외하곤 일어나면 어김없이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래서 하얀 화면을 운동장 삼아 뛰고 춤추며 내 마음 가는대로 뒹굴었다. 그렇게 쓴 글들 덕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다짐을 하기도 했지만 꼬마 손님 덕에 든 의문-'계속 이렇게 글을 써도 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큰 맥락에서 글쓰기의 도움이야 받겠지만, 미완성된 과제처럼 내 꿈 역시 미완성으로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일 아침, '새벽 4시의 편지' 카테고리에 올리던 글 대신 다시 퇴고를 시작하자고 마음 먹게 된 건 이 글을 중반정도 쓰고나서였다. 여태껏 '퇴고하던 거 마무리 짓고 투고해야지.'라고 암만 스스로에게 얘기를 해도 통 내키지 않던 마음이 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동안 퇴고를 떠올릴 때면 문장과 단어 사이에 갇혀 머리를 싸 맬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는데 어쩐지 오늘은 내가 가꾼 정원을 거니는 것처럼 즐겁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꽃들 사이 핀 잡초를 뽑고, 시든 꽃에 물을 주는 마음으로 초고를 살필 수 있다면 투고 결과와 상관없이 즐길 수 있을텐데.
벽에 붙여진 사진 속 나를 바라본다. 무심한 얼굴로 사인을 하는 저 이에게 묻고 싶다. "너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자리에 간 거니?" 대답이 돌아오진 않지만 알고 있다.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이 저 뒤에 있었음을, 수없는 눈물과 좌절이 동반되었음을. 그럼에도 내가 될 수 있는 다양한 '나' 중 제일 되고 싶은 저 모습을 꿈꾸며 다시 나의 숙제, 나의 레이스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