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가끔 운수 좋은 날이 있다. 오늘처럼. 우연찮게 생긴 오후의 자유시간에 가고 싶었던 전시회에 다녀왔다. 평일 오후의 관람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호사인데, 입장권 발급차 내민 카드를 되돌려 받았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문화가 있는 수요일’이 오늘일 줄이야. 덕분에 무료 관람까지 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입장 전부터 나를 신나게 했던 전시회는 바로 제주도립미술관의 ‘시대유감’-이건희 컬렉션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그 이름의 영향력은 사후에도 여전했다. 박수근부터 시작해 이응노, 김기창, 강요배, 김환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그의 컬렉션은 마치 한국 근현대사의 미술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그 중에서 나의 시선을 유난히 끌었던 작품은 김기창 화백의 ‘학’이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우리 반 학생 가은이와 나연이를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데서나 양말을 벗어대는 가은이와 가끔 손으로 밥을 집어 먹어 주위 아이들을 질겁하게 했던 나연이는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한 여덟 살 여학생들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싫어한다는 공통점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는데 바로 목소리가 크고 양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주, 자리를 바꾸며 하필 옆에 앉게 된 탓에 둘은 하루에도 뻥 안치고 열 번은 싸우기 시작했다. 전투의지는 높지만 아쉽게도 아직 어휘력과 표현력이 부족한 탓에 싸움 레파토리는 매번 같다. 한 명이 “어쩌라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이 “저쩌라고!”를 말하며 어깨빵(?)을 하는 식이다. 보통의 여자아이들이 몸싸움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싸움을 하는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웃긴 건 그렇게 거칠게 싸운 후 5분도 되지 않아 내 앞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과하는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내가 미안해.”, “괜찮아. 나도 미안해.” 라고 미리 약속해 둔 대사처럼 말한다. 그 모습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 되풀이 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 아이들을 떠올리며 <학>을 보고 있자니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안간힘을 쓰고 소리지르는 두 마리 학이 마치 “어쩌라고!”,“저쩌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껏 벌린 날갯짓마저 짜증내며 손과 발을 쿵쿵 구르는 그 아이들과 더할나위 없이 똑같다. 그림에 그려진 해와 달도 마치 등교해서 하교할 때 까지 싸우는 그 시간을 표현하는 것만 같다.
나의 기막힌 해석에 스스로 감탄하다 문득 미술관에 와서도 아이들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엄청난 역작들 사이에서 생각하는 게 고작 한글 공부하라고 나누어준 공책엔 낙서를 해 놓는 아이들이라니.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은근슬쩍 가은이와 나연이를 그려 본다. 답도 모르면서 손들어놓고 막상 지목받으면 곤란해 하는 가은이의 난처한 미소나 “선생님, 이거 지금 먹어도 돼요?”라는 말에 답을 하기도 전, 내 손을 낚아채는 나연이의 하얗고 포동포동한 그 손 같은 것들. 어느 누구도 결코 소장하지 못할 나만의 소중한 컬렉션들을 말이다. 아무래도 초등교사로 살아가는 나는 대체적으로 행복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