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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Sep 14. 2023

실패로 끝난 결혼이 당신에게 갖는 의미란 무엇입니까?

뿌리와 날개의 국제커플 연대기/ 국제결혼 번외편

제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서 10여 년 전의 결혼생활 3년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치유”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결핍이 있게 마련이죠. 저에게는 그 결핍이 ‘안정감’이었습니다.


저는 불화한 부모님 밑에서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소년기를 힘겹게 보내면서 그 안정감이 행복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오는 건 줄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족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저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되돌려보고도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제가 갖지 못한 행복한 가정을 아이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을 하고, 현모양처가 되면 제가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3년간 남편과 함께 살면서 실제로 가장 안정감을 느꼈던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틀이었습니다. 남편은 늦어도 밤 10시면 잠자리에 들어서 아침 6시면 기상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친구도 없고, 모임도 싫어하는 사람이라 일 끝나면 바로 퇴근해서 저녁 6시면 같이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합니다.


주말에는 오전이면 조깅을 하거나 저랑 같이 헬스장에 갔다가 점심 먹고 책을 읽었고요. 낮 2-3시쯤 되면 자기가 좋아하는 와이셔츠들을 모아서 직접 세탁을 하고, 그 시간만큼은 방문을 닫고 좋아하는 음악 켜놓고 혼자 다림질을 하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쳇바퀴같이 도는 일상을 보내는 남편 일과에 맞춰 저도 따라 살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두 분이 같이 식당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남매는 항상 집에 오면 잠들 때까지 둘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와 동생은 일상에 정해진 패턴이나 규칙이 없이 살았습니다. 지금 빈이 만한 어린애 둘이서 무슨 루틴에 맞춰서 일상을 굴리겠습니까! 학교 갔다 오면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밖에서 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초저녁부터 자다가 밤늦게 깨서 말똥말똥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비디오랑 만화책 빌려다 보면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기도 하고, 또 그러다 엄마아빠가 너무나 보고 싶은 어떤 날은 둘이 손 붙잡고 부모님 가게 가서 손님방 한편에 앉아가지고 새벽 1시에 장사 마치실 때까지 숙제도 하고, 티브이도 보고, 숨바꼭질도 하고 그러면서 매일매일 상황 따라, 기분 따라 산 겁니다.


근데 이렇게 애들을 풀어놓고 키우면 아이들이 되게 자유분방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멋대로 자랄 것 같죠? 뭐 애들마다 기질이 다 다르겠지만 저희 남매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방임 상태에서 자라게 되면, 꼭 사방이 탁 트인 허허벌판에 의지할 곳 없이 서 있는 느낌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몸 가릴 곳 없이 지평선 밖에 안 보이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안전지대고, 어디서부터가 도전이나 탐험이고, 어디서부터는 위험한 곳이라 가면 안 되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와 동생은 안전하기 위해서 발 밑에 우리 둘이 설 수 있는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우리만의 바운더리 안에서만 머물렀습니다.


일상에서 꼼꼼하게 돌보고 규칙을 정해줄 어른이 없으니 엄마아빠가 말씀해 주신 큰 틀을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정도에서 벗어난 짓은 아예 쳐다도 안 봤고, 공부해라, 숙제해라, 내일 준비물 챙겼냐 하는 잔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더 꼼꼼히 챙겼습니다. 동생 것도 봐주고요.


제가 초등학교 6년 내내 입학식 날 부모님께서 가르쳐주셨던 한 길만 이용해 등하교를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랑 동생은 지금도 나이에 안 맞게 좀 고지식한 면이 남아있어요.








남편의 틀에 박힌 일상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저에게 처음 가져보는 안전한 울타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내가 지켜주는 안전한 영역이야. 여기는 사과나무, 저기 가면 시원한 냇가에 발도 담글 수 있어. 저 골짜기는 위험하니까 가지 마. 그리고 여기는 우리가 사는 따뜻하고 안전한 오두막이야. 시계 여기 있으니까 6시까지만 돌아오면 돼. “


이제는 눈앞에 울타리가 보이니까 이렇게 아무 데나 맘대로 돌아다녀도 안전해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만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경직돼서 나와 본 적이 없었던 저만의 조그만 동그라미 선에서 나와서 남편이 쳐준 그 넓은 울타리 안을 탐색하면서 조금씩 다시 세상을 향한 내면의 걸음마를 아장아장 배우기 시작합니다.


자,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은 다 저의 내면 안에서 이십여 년에 걸쳐 조용히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아마 저희 부모님께서는 이 영상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왜냐면 제가 말한 적이 없으니까요.


부모님 입장에서는 시키지 않아도 항상 혼자서 야무지게 할 일 다 하던 딸이었고, 하고 싶은 거 있다 그러면 다 할 수 있게 열심히 지원해 주며 키웠기 때문에 제가 속으로는 이런 느낌을 갖고 크고 있었는지는 꿈에도 모르셨을 겁니다.


그런데 저도 이혼하고 많은 일을 겪어가면서,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 뒤에야 아, 내가 그때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깨달은 것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래서 자식 겉 낳지 속 낳는 거 아니라고 하는 거죠.


아무튼 그렇다 보니까 저는 남편의 그 틀이 좋았습니다. 제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굉장한 길치였던 데다 유럽에 별 관심도 없었고,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도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도 익숙한 걸 더 좋아합니다. 유학이네, 워홀이네 남들이 부러워하고, 좋다고 하니까 좋은가보다 하고 끌려는 다녔는데 사실 제 진짜 깊은 내면에서는 그런 것들이 내키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결혼하고 첫 세 달 동안 남편 없이 신혼집 밖으로 나온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 좋다는 비엔나에 살면서도 남편 없이 대중교통을 혼자 이용한 것도 이사 온 지 석 달이 지나서였고요. 이렇게 말하면 남들은 잘 이해를 못 합니다. 저희 엄마도 당시에 그랬어요. 젊은 애가 왜 그러고 사냐고.


그런데 저는 그때까지 늘 쫓겨 살았어요. 한국의, 그 무한 경쟁 테두리 안에서 꿈도 열망도 없이 남들 다 미친 듯이 뛰니까 이유도 모르고 나도 같이 미친 듯이 뛰면서, 아르바이트하면서도 학점 관리 해야 되고, 무대 공포증이 있어도 발표 수업 해야 되고, 영어가 싫어도 끝없이 토익 점수를 올려야 되는 거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다는 걸, 세상에는 다른 길도 많다는 걸 몰랐습니다. 대학에서 만난 애들은 벌써부터 차를 끌고 다니면서 교수가 들어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으면서 저 백이 얼마 짜리네, 저 시계는 얼마짜리네, 누구는 타워팰리스 사네, 누구는 부모 직업이 뭐네, 떠들어대는데 저는 그런 거에 일체 관심 없이 살다가 대학 와서 처음으로 어마어마한 빈부의 격차를 체감하게 되니까.


막 다들 9시 첫 수업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정장 원피스에 백 들고 힐을 신고 오는데, 나름 그래도 대학 왔다고 남보다 작은 키 좀 감춰보려고 고속터미널에서 산 5만 원짜리 이만한 굽이 달린 구두를 신고도 여전히 난쟁이 똥자루만 해가지고 발 아프다고 뒤뚱거리면서 걷는 이런 내가 쟤들 눈에는 얼마짜리 인간으로 보일까? 싶어서 주눅 들고 창피하고.


이렇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 저의 내면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고, 끝도 없이 불안했습니다. 뭐 하나라도 만만하게 보이면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들 시선도 두려웠고, 그래서 항상 이렇게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남편과의 결혼으로 비로소 굉장한 안정감을 느끼게 되면서, 그동안 긴장하고 사느라 몰랐던 그간의 피로가 밀려와서 정신적으로 노곤노곤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남편이 만들어준 이 따뜻한 동굴 안에서 내적인 동면에 돌입합니다. 행동반경과 대인관계를 최소화하면서 비로소 내면의 나에게 집중을 하기 시작하는 거죠.








무엇보다 이제 싸우는 부모님이 안 계시잖아요. 청소년기 내내 제 유일한 소망은 부모님의 사이가 좋아지시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제가 중간에서 노력을 해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죠. 그건 그들의 문제니까요.


시지프스의 돌덩이라고 아십니까? 돌덩이를 밀고 언덕 위로 올라가야 되는데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떨어지고, 또다시 밀고 올라가면 또 떨어지는 돌을 밀어 올리기를 반복하는 형벌입니다.


불화한 부모 사이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자식의 기분은 딱 그렇습니다. 그 형벌의 주인공처럼 학창 시절 내내 저는 부모님의 관계를 개선해 보고자 정신적으로 얽매여 살았어요. 그래서 정작 저 자신한테는 관심을 쏟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개인주의적인 서양인 남편이 나타나서 그 고리를 싹둑 잘라줍니다. 늬 부모가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거면, 너를 이렇게 아프게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네가 너의 부모로부터 고통받고 있다는 건 너의 부모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반증아니냐면서 너네 엄마아빠는 너의 마음이 아프건 말건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너도 그 사이에서 빠져서 니 인생을 살라고 해요.


법륜스님이 항상 그러시지 않습니까? 부모가 싸우건 말건, 그건 저들끼리 내버려 두고, 너는 누가 이기는지 손뼉 치고 구경하면서 니 인생 그냥 살면 된다고. 한창 십 대 시절에 그렇게 싸우시는 부모님이 미워서 빈정거리고 있으면, 주변 어른들이 저더러 싹수없다고 부모님한테 태도가 그게 뭐냐면서 늘 저한테만 뭐라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고통받고 있던 제 마음을 알아주고 제 편을 들어주는 거예요. 게다가 논리적으로도 완벽하죠. 그래서 저는 이때 부모님과 저 사이의 모순을 깨닫고 비로소 어리석은 집착을 놓게 됩니다.


청소년기 내내 제 머리에 써졌던 이 빌어먹을 금강고, 부모님에게 집착을 하면 할수록 더 아프게 죄어오던 이 고통의 금강고를 벗게 되는 겁니다.


어떤 작자들은 저라는 한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해서 눈곱만 한 관심도, 일말의 애정도 없는 주제에 제 결혼생활 3년을 두고 아주 쉽게, ‘독일 넘어와서 게으르게 왜 아무것도 안 했어? 남편한테 그렇게 의지하면서 살았으니 이혼이나 당하지!’라는 말을 당당하게 뱉고 갑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나 다 살면서 한 번쯤은 인생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움츠려 들고, 작아져서 내면의 밀도를 높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 건강한 나로 거듭나고, 더 큰 나로 성장하기 위해서 내 지난 상처들과 마주하고, 그 아픔을 돌보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야만 비로소 내 목소리, 고통에 얽매여서 울부짖기만 하던 소리가 아닌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저에게는 외부의 시선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산 것 같은 그 결혼생활 3년이 바로 지난 15년 동안 곪을 대로 곪아있던 유년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재생, 재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훗날 저는 이혼이라는 폭우를 맞고 비로소 대나무처럼 쑤욱, 그동안 밀려왔던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되는 거예요.


안타까운 건, 제가 그렇게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해 가는 동안 제 남편은 함께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저에 대한 울타리를 점점 조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저는 내면이 자꾸 건강해지니까 자신감도 차오르고, 용기도 생겨서 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은데, 남편은 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작고 귀여웠던 동양인형이 자꾸 당당한 한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니까 불편해지는 겁니다.


시부모님과 시누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이 사람들은 일평생을 자기 식구들끼리만 모여서 방 안에 커다란 코끼리가 있는데도 누구 하나 아는 척을 안 하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왔는데 갑자기 동양에서 굴러온 계집애 하나가 끼어들어서 조금씩 독일어를 배워가더니 자꾸 저거 보라고, 저 집채만 한 게 진짜 안보이시냐고들 하니까 제가 점점 불편한 겁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면에 자기 만의 결핍과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자기 안의 상처가 어루만져질 때 편안해지고 그 상처가 덧나지 않고 아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옆에서 행복함을 느껴요. 제가 남편의 곁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저는 살면서 남편의 이기적인 모습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게 밉게 보이기보다는 이제 제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플 때 그 사람이 돌봐줬으니 이제 그 사람이 아픈 거 제가 돌봐줄 차례죠.


돈 없다고 저한테 눈치 줄 때에도 치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으로서 물질적으로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면 저럴까 이해가 갔고, 낭비벽이 보일 때에도 없이 자라서 저러는가 보다, 나이도 어린데 갖고 싶은 맘 꾹 참고 가장노릇하려니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짠했습니다. 사랑이 그런 거죠.


파경을 맞을 때에도 남편 상황이 참 힘들었거든요. 아기는 태어났죠, 나라를 바꾸는 이사도 했죠,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새 직장에 출근도 해야 되죠, 근데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외국인 와이프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죠. 타지에서 자리 잡아 보신 분들은, 부모님이든 형제자매든 친구나 지인이든 이 조금이라도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건 지 잘 아실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환경이 저한테도 힘든 거였어요. 저도 독립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님 품 떠나 철없을 때 엄마가 됐고, 타지에서 아무도 없이 외롭고 쓸쓸한 환경이었죠.


애 낳고 여자들 많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습니까?  맘카페 가면 막 육아헬이라고, 못 먹고 못 잔다고 죽고 싶다 그러는 글들에 공감하는 댓글들이 수십 개씩 달리고 그런 걸 많이 읽었기 때문에 저는 진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제가 간절히 원하던 결혼이었고, 갖고 싶던 자식이었어서 그런가 우울증도 없었고, 육아가 생각보다 할 만했어요. 그리고 빈이가 참 순했거든요. 그래서 아기랑 함께 하는 시간들이 참 편안했고, 또 모유수유를 하다 보니까 이 호르몬 때문에 황홀했어요.


뭐 물론 서럽고, 힘든 날이 왜 없었겠냐마는, 매일같이 남편 출근하는 모습을 배웅할 때면 그런 불평이 쏙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런 남편이 있어서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데, 우리 남편은 내가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혼자서 부담이 얼마나 클까 싶어서 그 춥고 컴컴한 새벽에 뚜벅뚜벅 출근길 걸어가는 뒷모습을 아기 안고 창가에 서서 지켜보면 보면 마냥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되게 가정적이었던 저희 아빠하고 오버랩되는 것도 컸던 거 같아요. 저는 평생을 성실하고, 가정적이셨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남다릅니다. 그래서 남편을 좀 아버지 보듯이 봤던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지난 5년 간 남편의 사랑으로 제가 웬만큼 내면이 좀 건강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보니까 출산과 육아를 통해서 조금씩 내적인 성장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되면서 사랑받는 것을 넘어서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이혼하고 8년째 싱글맘으로 잘 살고 있는 저는 이제, 결혼이라는 시스템과 인간이 불안을 다스리는 일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의 3년 결혼생활은 제가 제 내면의 상처에 집중하고, 불안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해 줬습니다.


결혼생활을 통해서 제가 원하던 평생의 안정을 얻지는 못했지만, 대신 앞으로 제가 어떤 가족의 형태를 갖고 살아가더라도 안정적일 수 있는 내면의 근본을 다지게 됐습니다. 또 평생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고도 남을 삶의 지혜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빈이라는 어마어마한 결실을 맺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보니까 앞으로도 약 60년 넘게 남아있을 제 삶을 벌써부터 기름지게 만들어 준 이 3년의 시간을 “실패한 결혼생활”이라고 바라볼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 결혼생활을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혼을 하신 여러분들, 아니면 꼭 이혼이 아니더라도 여러분 삶에서 뭔가를 열심히 해봤는데 결국 실패로 끝나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 여러분은 지금 그 경험에 어떤 이름표를 붙여주셨습니까?


오늘도 영상을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구독과 좋아요는 여러분의 자유, 그리고 세상 모든 한부모 가정을 향한 자유입니다. 다음 영상에서 봬요 그럼, 안녕!



https://youtu.be/TmBd3tmgeps?si=GXOYpiLNdHM7Mk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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