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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Sep 21. 2023

바람이 나려면 내가 나야지, 왜 네가 나...?

뿌리와 날개의 국제커플 연대기/ 국제이혼 하편

많이 기다리셨죠? 국제이혼 하편 바로 들어갑니다. 이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헤어지던 그날까지도 성욕이 막 넘치고 그러지는 않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처음 이 사람이 자기 입으로 바람이 났다고 했을 때도 좀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니, 바람이 나려면 내가 나야지, 왜 지가 나! 그죠?


장거리 연애 2년 하면서 그렇게 몇 달 만에 만나도 항상 점잖았고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 그렇게 문제는 아니었어요. 번듯하게 생겼고, 침대 매너도 좋았고, 섹스도 잘했으니까. 다만 성욕이 저에 비해서 적을 뿐인 거죠.


그런데 욕구라는 게 사람마다 다 다른 거잖아요. 잠도 누구는 6시간만 자도 되는데 누구는 10시간을 자야 하듯이. 그래도 항상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손 잡고, 뽀뽀해 주고 이쁘다 하니까 그게 5년 동안 별 불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임신하고부터 점점 줄어들던 잠자리가 아기를 낳고부터는 아예 뚝 끊기니까 몸도 마음도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게다가 아기가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수유하는 횟수는 줄어들고 월경이랑 성욕은 돌아오는데, 잠자리는 없는 거죠.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제 감정에 공감은 해주면서도 대화가 깊게 들어가는 걸 회피하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지 이유도 안 알려주고 대화 자체를 피하는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합니까? 그렇다고 막 집요하게 파고들 수는 없잖아요. 섹스리스라는 게 일방적으로 한쪽이 족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데.


게다가 그 문제의 특성상 심리적인 요인이 굉장히 크지 않겠습니까? 괜히 잘못 건드렸다 정신적 트라우마로 평생 발기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제 나름대로 최대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다가갑니다.


근데 여러분, 배우자에게 다가갔다가 섹스를 거절당해 보신 적 있으세요? 뭐 면박을 주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나의 간접적인 요구에 간접적인 거절을 몇 번 당했을 뿐인데도 아, 진짜 내가 구걸하는 느낌이 들면서 정말 자존심 상합니다.


그렇게 아기가 돌이 될 때까지 1년 동안 겨우 겨우 남편을 꼬셔서 세 번의 섹스를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저는 처음으로 이 결혼제도가 가진 리스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죽을 때까지 얘는 나랑, 나는 얘랑만
자기로 약속한 게 결혼 아니야?

그런데 내가 원하는데도
얘가 나랑 안 해주니까
나는 할 수가 없네?
뭐지, 이게?  

결혼 3년도 안 됐는데 1년 동안 세 번이면
앞으로 점점 더 줄면 줄었지 늘지는 않을 거 아냐.

내 나이가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이게 결혼인가?



이 얘기는 하다 보면 또 끝도 없어서, 나중에 찍고 싶을 때 영상을 따로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남의 집 침실 얘기 재미있겠죠? 아무튼 이렇게 남편과의 상황을 대하는 저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십니까?


네, 저는 이렇게 아기를 키우면서 점점 당당해지기 시작합니다. 남편만 바라보고 있다가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독일어도 다시 공부하고, 일도 해보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 집안의 문제들도 하나씩 제 방식대로 해결해 나가기 시작해요.








예전에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깊게 생각을 안 하고 전적으로 남편 결정에 맡기거나 남편 뜻에 따랐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뭔가 아니다 싶은 게 있으면 저 스스로 파고들고, 날카롭게 이의를 제기하면서 다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학보사 기자를 괜히 했겠습니까? 제 대학 때 꿈이 기자, 저널리스트 계통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러면서 남편은 저를 점점 더 불편해합니다. 제가 남편 말 잘 듣고 조용히 살 때는 자기가 대신할 일이 많기는 해도, 모든 것이 자기 통제 하에 있으니까 어쨌거나 편했을 거 아니에요. 이제는 제가 제 템포와 스케줄에 맞춰서 스스로 해나가고 적극적인 요구도 늘어나니까 통제불능이 된 거죠.


그러니까 부부사이의 갈등도 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러던 와중에 5월 이사를 앞두고 4월의 어느 주말, 제가 작심을 합니다. 그때까지는 제가 좋게 좋게 에둘러서 말하면 회피하기만 하던 남편을 드디어 딱! 잡아놓고 앉아서 이 불평등하고 불편한 상황에 대해서 말을 꺼낸 거죠.


그런데 전에 없던 이런 진취적인 대화가 잘 오고 갔을 리 있겠습니까? 서로 감정만 상한 거죠. 그래서 이 날의 대화가 싸움으로 번져 결국 저희는 일주일 동안 서로 말을 안 하게 됩니다.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때는 이제 이미 남편의 통제가 극심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싸우기 전에도 아침에 저더러 일어나서 아침식사 준비도 하지 말고 아기랑 방에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했었거든요. 출근하는데 방해된다고.


그래도 제가 그때까지는 억지로 일어나서 배웅은 했었는데, 그때는 월요일에 출근할 때 배웅도 안 하고, 집에 들어와도 서로 말없이 핸드폰만 봤습니다. 저도 이제 화가 난 거죠. 그리고 그 싸움이 있기 훨씬 전부터 저는 돌쟁이 아기랑 둘이서 5월에 비엔나 여행을 준비 중이었어요.


아기 낳고 1년 동안 가족끼리 한 거라고 실내 수영장 한 번 같이 간 게 다인데 뭘 바랍니까? 엄마아빠한테 아기 좀 보여주고 싶어 가지고 한국 좀 가고 싶다 그래도 아기랑 제가 보고 싶다고 못 가게 하죠. 그렇다고 가족여행을 가주는 것도 아니죠. 그러니까 비엔나에서 알고 지내던 언니들이라도 보고 싶어서 짧게나마 좀 다녀오려고 한 거예요.


비행기표, 호텔 다 예약해놓고 다음 주면 출발이었거든요. 그래서 말을 안 하면서도 그냥 ‘둘 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그런가 보다. 우리 여행 가 있을 동안 남편도 좀 혼자 쉬고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남편들은 왜, 여자가 아이 데리고 친정 가는 거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 거죠.


그런데 금요일이 돼 가도록 남편이나 저나 서로 먼저 말 거는 사람이 없이 시큰둥한 겁니다. 진짜 5년 동안 이런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저도 지기 싫은 겁니다. 남편이 저보다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라 제 입장에서는 항상 남편을 좀 조심스럽게 대했어요.


저는 잠들면 폭탄이 떨어져도 모르는데, 남편은 조금만 마음이 불편해도 밥도 안 먹고, 잠도 못 잘 정도로 아주 스트레스에 취약했거든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나름 남편 기 살려준다고, 굳이 이길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항상 그렇게 배려를 해왔는데, 이게 벌써 5년 됐잖아요.  왜 맨날 저만 다가가고, 저만 좋게 풀어야 됩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 저도 의존적인 독일살이 3년 차, 이미 불만이 쌓일 만큼 쌓여있었어요. 아기 낳고 1년을 벌써 집에만 박혀있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주중에 내내 남편이랑 말도 안 했죠. 아무리 제가 집순이라도 이 집구석에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는 정말 폭발할 거 같은 거예요.


그래서 토요일에 날이 밝자마자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고 나가버립니다. 그 당시의 저로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결심이었어요. 저는 모유수유하는 1년 동안 한 번도 유축으로 젖을 냉동해 본 적이 없거든요. 항상 아기를 달고 다닌 거예요, 어딜 가나.


아기 낳고 초반에 두 달 집에서 애 봐주거 말고는 돌이 넘을 때까지도 단 한 번도 저에게 나가서 놀 자유시간을 준 적도 없었고, 주말에 집 근처 공원이나 가끔 산책했지, 수영장 한 번 말고는 어디 근교로 소풍 한 번을 안 갔습니다. 차가 없으니까.








친구도, 다른 가족도 없이 집구석에서 일 년째 애만 보고 있는 게 얼마나 답답한 지 아십니까? 저같이 산후우울증 없고 명랑 쾌활한 여자도 1년 지나니까 독어 한마디도 못하는데도 어디 뛰쳐나가서 알바라도 하러 나가고 싶을 정도로 정말 갑갑합니다.


그래서 아기를 남편 품에 딱 안겨주고 신발을 신으니까 사색이 돼서 쫓아 나옵니다. 나더러 어떡하라고 애를 주고 가냐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습니다. 남편한테 힘들다고 징징거릴 필요 있습니까? 안 겪어보면 절대 몰라요. 우는 애 안겨주고 하루 자기 혼자 생쇼 해봐야 알죠. 이유식 냉장고에 있겠다, 분유도 있겠다, 토요일 몇 시간 지 새끼 지가 본다고 애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무작정 기차역으로 가서 아무 데나 기차표를 샀습니다. 1박 2일로 가도 되는데 아이고, 그래도 어미라고 새끼가 눈에 밟혀서 멀리도 못 가고 기차로 한 시간 떨어진 도시가 있어요. 한국에서도 유명한데 항상 가보고 싶었던.


그래서 난생처음 세상에, 독일 땅에서 혼자서 기차표를 끊고, 그렇게 즉흥적으로 기차를 탑니다. 그래서 그날 그 낯선 도시에서 애 낳고 처음으로 유모차 없이 혼자서 여행을 해요. 도시 중앙에 산이 하나 있는데, 거기 올라가면 도시 전체가 다 보인대요. 그래서 겁도 없이 2시간 인가, 3시간 인가 혼자서 산도 타고요. 정말 정처 없이 많이 걸었습니다.


4월 중순이니까 이제 막 날이 풀리기 시작했을 거 아니에요. 그 바람, 그 햇살, 그 자유로움. 그때 저는 큰 해방감을 느낍니다. 육아, 남편, 무기력한 결혼생활과 남편의 통제가 극에 달했던 마지막 몇 달간의 상황. ‘아… 나 혼자서도 여행이 가능하구나. 나도 하니까 되네?’ 이런 걸 깨닫게 되는 거죠.


그렇게 저녁 6시쯤 집으로 돌아왔더니 남편이 저를 노려보더라고요. 얼굴은 사색이 돼있고, 눈은 퀭 해가지고. 나는 그때까지 밤낮없이 하던 육아인데 방구석에서 꼴난 몇 시간 지 새끼 좀 봤다고 노려보는 게 가잖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이 그러대요.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저도 그랬습니다. ‘나도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그러면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모든 걸 말했습니다. 아주 티끌만 한 것까지 다.


심지어 그때까지 저는 남편이 바람이 났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기 때문에 의심도 없었지만, 그 여자상사 때문에 저를 무시한 일이 한 번 있었거든요. 아무리 제가 무던해도 그게 굉장히 마음에 걸렸었어요. 상처가 됐죠, 나름. 그래서 그 당시에는 참고 넘어갔는데 그 얘기를 꺼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남편이 제가 그 상사 얘기를 꺼냈을 때 굉장히 화들짝 놀라면서 그렇게 느꼈냐고, 너무 미안하다고 저의 감정에 유난히 공감을 많이 해줬어요. 너무 사소한 걸로 괜한 사람 트집 잡나 싶게 느껴질 만큼 많이 미안해하길래 기껏 얘기 꺼내놓고 그냥 다시 넘어갔는데, 아마 스스로 찔려서 그랬던 것 같아요.


뭐 무슨 내용으로 싸웠었는지 자세히 다 기억은 안 나지만, 또 제가 그 얘기를 했던 게 생각나요. 너는 일어나려는 나를 항상 다시 주저앉혀서 휠체어 위에 있게 만드는 거 같다고.


그때 제 느낌이 그랬거든요? 임신 중기부터 출산하고 한 반년쯤 되니까 거의 일 년을 집에만 있는 거잖아요. 정말 심심하더라고요. 그래서 비엔나에서 홀몸으로 지낼 때도 집에만 있던 제가 이제는 막 나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아기 모임도 3개씩 나가고, 아기 유치원도 혼자 알아봤거든요.


독일은 만 3세부터 유치원을 보낼 수 있고 맞벌이가 아니면 3세 미만은 어린이집에 보내기 힘들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지루하니까 돌쟁이 아기를 데리고 집 근처 유치원에 가서 대기자 명단에 혼자 넣어놓고 오고 그랬거든요.


저는 그때 이제 좀, 공부 이런 것보다는 뭔가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을 좀 배우고 싶었어요. 남편이 처음에는 뭐 대학원이든 뭐든 다 지원해 준다 그래서 그거 믿고 있었는데 살아보니까 이제 슬슬 각이 나오잖아요. 이거 아니겠구나.


또 이 여자 상사가 자기 능력을 인정해 줘서 자기 커리어가 잘 크고 있다잖아요. 그래서 독일에 우리 계획보다 오래 머무를 거 같은 거예요. 그래서 뭔가 말이 안 통해도 먹고살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그릇 만드는 회사에서 직업교육을 받아볼까도 생각해 보고. 근데 남편이 아기가 어리니까 일단 아기가 세 살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시작하면 어떻겠녜요. 저도 뭐 독어도 잘 못하고, 자신감도 많이 없으니까 또 너무 어려울 거 같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슬그머니 “응….” 그렇게 생각을 접고.


그러다 또 집에 있는 게 답답해지면 제가 영어는 잘 못해도 중국어를 할 줄 아니까 호텔에서 메이드 일 있잖아요? 침대 시트 갈고 이런 거? 아기 유치원 가 있는 동안 파트타임으로 이런 일을 먼저 시작해 볼까? 도 싶고. 그런데 남편이 호텔 일은 또 창피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럼 너네 회사에서 옷 만드니까 옷 포장 하는 일 자리 같은 것 좀 알아봐 줄래? 했더니 뭐 그건 생각해 보겠다고, 막 남편이랑 그런 얘기들을 하던 참이었어요. 저도 남편한테 돈 받기가 슬슬 부담스러워지는데 돈은 쓰고 싶으니까 돈을 벌어야겠다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제가 자꾸 뭔가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남편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제동을 거니까 나는 자꾸 내 두 건강한 다리로 걸으려고 하는데 남편이 저를 주저앉히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널 사랑하니까 내가 다해줄게 하고 제가 탄 휠체어를 미는데, 저는 건강한 사람인데 꼭 억지로 장애인이 된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한 거죠. 그랬더니 거기서 또 남편이 화들짝 놀라고. 우리가 서로의 모국어가 아니라 제3 국 언어인 중국어를 쓰다 보니까 제 감정표현을 전달할 수 있는 단어사용이 정확하게 안 되는 거죠. 제가 그 단어를 중국어로 알아도 남편이 모르면 못 알아듣잖아요. 그래서 항상 이렇게 그림 그리듯이 묘사를 해서 제 감정을 표현하고 살았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그 저녁에 몇 시간 동안 서로 밀린 이야기들을 다 합니다. 물론 감정이 격해질 대로 격해진 상태로. 그러다 남편이 저더러 한국에 가라고 해요. 가서 좀 쉬다 오라는 거예요. 자기도 너무 피곤하니까 시간을 갖자면서.


그래서 뭔 소리냐고, 갑자기 왜 한국을 가라고 하냐니까 네가 항상 가고 싶어 하지 않았냐면서 이 참에 부모님한테 아기도 보여드리고, 푹 쉬다 오래요. 너도 많이 힘들지 않냐면서. 그래서 비엔나 여행 예약해 놓은 건 어떡하냐니까 괜찮대요.


아니, 그렇게 돈 앞에 쪼잔하던 사람이 그것도 제쳐두고 한국에 가라고 하니까 저는 ‘이 남자가 나를 보내놓고, 연락을 끊고, 우리 짐을 다 버리고, 팔고, 이혼하자고 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이고…. 저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세상에 짠돌이가 저런 제안을 다 할까!’ 싶어서 그냥 알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감정이 격해져 있으면 대화가 잘 안 되잖아요. 그럴 때는 사실 좀 쉬어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뭐 떨어져 있을 공간도 없고, 애를 맡길 양가 부모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해서 1년 동안 서로 육아 스트레스도 컸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남편 말대로 이 참에 좀 쉬면서 서로 숨 좀 고르자 싶었고.


또 남자들은 너무 힘들면 동굴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잖아요. 그동안 봐온 결과 이 사람 멘탈이 저보다 약하다는 것도 확인됐고. 그래서 일단 서로 먼저 여유를 찾은 뒤에 문제를 해결해나가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그때가 토요일 밤이었는데 다음날 일요일 낮 편도 비행기를 저한테 끊어주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티켓 사는 걸 망설이는 거예요. 아마 이 사람은 그때 이렇게 보내놓고 자기는 연락을 끊어버리고, 그럼 우리는 다시 못 돌아올 거라는 시나리오를 이미 머릿속에 그려봤던 것 같아요. 혼자 마음속에서 끝을 낸 거죠.


그래서 선뜻 결심이 안 섰던가 봐요.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몇 번이고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별 생각이 없었어요. 가족이잖아요. 갔다 오는 거니까. 그리고 저도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엄마아빠 곁에서 푹 쉬다 오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단 편도도 괜찮았고.


다만 다음날 바로 떠나라는 게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서로 붙어서 싸우면서 할퀴고 상처 주는 것보다는 휴전이 나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티켓을 끊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분위기가 좀 누그러지면서 서로 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게 돼요. 어차피 아기랑 저는 몇 시간 뒤면 떠나니까. 그래서 서로 울고 웃고, 서로 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미안하다 사과도 하고 그러면서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죠.


그러더니 남편이 새벽 무렵에 아기 자는데 가서 한참을 물끄러미 아기 자는 걸 바라보더니 머리통부터 발바닥까지 뽀뽀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안녕, 이러는 거예요.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을 봤을 때 아마 그 사람은 이 순간에 아기한테서 정을 다 뗀 거 같아요.


그 후에 두 달 뒤에 제가 한국에서 남편 몰래 독일로 돌아와서 열흘 동안 같이 살다가 보호소로 들어가려고 남편 집에서 나왔을 때에는 남편이 아기를 쳐다도 안 봤거든요.


우리 이제 간다고 아기 안고 그 사람이랑 마주 보고 섰는데 그 사람은 삐딱하게 서 가지고 아기한테 눈길 한번 안 주고 핸드폰만 보고 있다가 저한테만 잘 가! 그랬거든요. 그래서 제가 정말 부들부들 치를 떨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저는 다음날 유모차를 끌고, 캐리어를 끌고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역으로 갑니다. 처음으로 그 비싼 택시를 태워주대요. 그 눈보라 치던 어느 겨울밤에도 기차 타러 갈 때 그 1킬로 되는 거리를 유모차를 밀고 가게 했거든요. 근데 우리 한국 보낼 때는 택시 태워줬어요.


짐 들고 플랫폼까지 따라와 주는 것도 아니고 기차역 입구에 내려주고 저 혼자 한 손으로 기저귀가방 달린 그 무거운 유모차 밀고 다른 손으로는 캐리어 끌고, 아기는 우니까 앞에 아기띠 했죠. 이러고 들어가는데 가는 뒤통수에 대고 잘 가라고 손키스를 하더라고요. 그게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그 사람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스트레스가 쌓인 채로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낯선 도시 돌아다니며 등산했죠! 그러고 돌아와서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남편이랑 싸우다 얘기하다 화해하다 생쇼 했죠! 아기띠 앞에 하고, 유모차 밀고, 캐리어 끌고 심지어 이 새끼가 기차표도 환승하는 걸 끊어줘서 꼴난 2시간 반 가는데 중간에 갈아탔습니다.


그게 뭔 말인지 아세요? 아기 앞에 안고 유모차랑 캐리어 들고, 기차에서 내려서 계단 내려가 다른 플랫폼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또 유모차랑 캐리어 들고 다음 기차에 탄다는 말이에요. 비행기표도 심지어 아부다비 7시간 경유를 끊어줍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제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래도 그때는 남편 원망 하나도 안 하고, 아부다비에서 그 더운데 녹초가 된 몸으로 10킬로가 넘는 아기를 앞에 달고 서서 7시간을 기다리다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그리고 공항으로 엄마가 마중을 나오죠.


공항에서 엄마가 아기를 받아주는 순간, 정말…. 몸이 날아갈 거 같았어요. 선녀가 날개옷을 입어도 그렇게 가뿐했을까 싶을 정도로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그 날부로 남편은 저와의 모든 연락을 끊고, 페이스북도 삭제하면서 돌쟁이 아기를 데리고 영문도 모른 채 피가 말라가는 한국에서의 두 달이 시작됩니다.


한국에서의 두 달간 스토리는 <움켜쥔 결혼, 그 끈을 놓았을 때> 1, 2화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오늘도 제 영상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고, 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는 자유, 세상 모든 한부모가정을 향한 자유입니다. 다음 영상에서 봬요, 안녕!



https://youtu.be/i07fqVPgih8?si=vYyV2kStBArZR8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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