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열여덟의 봄

by 수 진

그날 오후,

엄마를 언니라 부르던 친한 이모가 찾아왔다.

마당에 있던 소녀는 먼발치에서 이모를 알아보고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다가갔으나

이모는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엄마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이모는 엄마에게 다짜고짜 말을 쏟아냈다.
“내가 말할까? 그냥 말해도 되겠냐고?”

방 안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거짓말처럼 뚜렷하게 꽂혔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 줘야 하지 않겠어?.”
염려가 아니었다. 협박이었고, 대가로는 ‘돈’이었다.


소녀는 방으로 들어가지도, 멀리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마당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 큰 마당에서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저 이모라는 사람의 목소리만 흘렀다.
입을 다문 채,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마디 한마디가 놓치지 않게 들렸다.


소녀는 그날 처음,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던 사람이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던 할머니,

죄인처럼 할머니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던 엄마..

그저,

아들이 귀한 집에

6대 독자의 대를 끊어놓은,

무남독녀 외동딸이 예쁘진 않았으리라

소녀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부모님의 나이 차가

24살이나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서 조차

아무런 의심도 해본 적 없었다.


이모는 마치 밖에 있는 나보고 들으라는 듯

엄마가 다 알고 있을 법한 지나간 이야기 마저

모조리 쏟아부었다.

아버지를 소개해 준 것도 자신이라며

두 모녀를 이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자신이라며


거기다

친아버지의 집은 지금 이곳과 비교가 안될 만큼

더 대단한 집이니

그곳도 찾아가 볼 것이라며...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니 같이 가보겠냐며...


엄마는 두려움에 덜덜 떨며 그저 울기만 했다.

그 떨림이 얼마나 두려웠던지

창 너머 소녀에게도 전해 지는 듯했다.


며칠 뒤,

소녀는 서둘러 받아 적었던 메모를 손에 들고

혼자 길을 나섰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았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으리으리한 대문들만 즐비한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맞았다.

자신의 집보다도 훨씬 큰 대문과 높은 담장을 가진

저택이었다.


문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그럴 용기는 없었다.
한참을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한 노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곱고 고상한 얼굴이었으나,

매서운 눈빛을 가졌던 어르신.
그 순간,

소녀는 자신과 너무도 닮은 얼굴을 보았다.


할머니


피가 흐른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낯섦과 막연한 소속감이

뒤섞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노부인도 소녀를 쳐다보긴 했지만, 말을 걸진 않았다.
서로 눈이 마주쳤으나 같은 생각이었을까,

정적만 흘렀고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소녀는 더 이상 그 문 앞에 설 이유를 찾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은 무겁고도 공허했다.

가족이라고 믿었던 존재가 낯선 이로 바뀌는 감각,
자신의 뿌리가 흔들리는 감정
열여덟의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비밀이었다.


아버지,

딸을 한 시도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분이다.

어쩜 저렇게

그림 그려 놓은 것 같이 이쁘게 생긴 아이냐고

지 아비를 똑 빼닮았다는 주변의 소리에

평생 꼿꼿하게 허리 굽힐 줄 몰랐던 아버지는

한사코 말리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자신의 이쁜 딸을 항상 안고 업고 다녔다.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만 받는 아내를

다른 한 손으로 꼭 쥐고 다녔다.


소녀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자신을 쳐다보던 그 고상한 어르신의 얼굴이

잊히지가 않았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며

사람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소녀는 많이 아파했나 보다.

식사를 못 하고 쓰러지고 입원하기를 여러 차례..


그 이후의 시간은 희미하다.

기억이 지워질 만큼, 충격이 컸던 것이다.
소녀는 살아냈다.
어떻게 견뎌냈는지는 본인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했다.

하지만 분명히, 그날 이후로는
예전의 소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