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손의 아내로, 시집의 종으로 들어간 날
그녀는 결혼했다.
사랑은 아니었다.
상처를 묻기 위한 결정이었다.
출생의 비밀을 더는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
혼처 이야기가 오가기 전에
누구라도 알게 되기 전에, 먼저 선택해버리고 싶었다.
같은 시청 내에서,
머리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고, 결혼하자고 말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집안의 장손이었다.
누나 셋, 그리고 고등학생 여동생이 있는
집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의 어머니에게는
“집안의 자랑, 나의 보물” 같은 존재였다.
그런 아들의 신붓감으로 들어온 그녀는
‘미모로 남자를 홀린 여자’가 되었다.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말 한마디 트집 잡진 않았지만,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상황은 달라졌다.
집안의 모든 커튼을 다 떼어내
손빨래를 하라고 시켰다.
시아버지는 항상 한복을 입으셔야 했다.
그 한복의 동정을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려놓으라 했다.
부잣집 외동딸로 곱게 자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시집살이 보다 더 괴로웠던 건,
술주정이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밤새도록 이어지는 술주정.
“내 아들 뺏어간 년…”
소리쳤고, 물건을 던졌고,
때로는 그녀를 잠 못 자게 흔들어댔다.
잠을 자려던 그녀를 깨워,
새벽까지 붙들고 욕을 퍼부었다.
그녀는 매일 밤
담벼락에 붙어있는 회색 쓰레기통 옆에서
동이 틀 때까지 울었다.
남편은 아무것도 몰랐다.
항상 아들이 깨기 전,
어머니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견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매일매일을 조용히 숨 쉬며 살아냈다.
그 사이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녀는 엄마가 되었다.
하루는 초등학교 1학년 딸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마당을 들어가 2층으로 올라 집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은 술 냄새로 가득했고.
여느 때처럼 할머니의 술주정 소리가
온 집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그날은
어린 딸아이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할머니가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엄마의 몸이 휘청거렸고,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딸은 주저할 것 없이 서둘러 엄마의 신발을 꺼냈고
안방 큰 창문으로 넘어 들어가
엄마의 가방과 지갑을 챙겨 나왔다.
현관문을 조금 열어 엄마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다
드디어 엄마와 눈이 마주쳤고 엄마를 불러냈다.
“엄마, 도망가.”
딸은 울먹이며 엄마의 등을 밀고
그 작은 몸뚱이로 두 팔을 벌려 엄마를 가려주었다.
“크면 내가 갈게. 엄마는 절대 오지 마.”
그렇게 그녀는 헝클어진 채 도망쳤다
초등학교 1학년인 어린 딸아이는 생각했다.
매일 밤 담벼락 밑에서 울고 있던 엄마가
너무 불쌍하다 생각했다.
새벽마다 잠을 깨면 옆에 없던 엄마를 찾아 내려갔다.
엄마 품에 안겨서
밖에서 같이 밤을 새우던 여러 날들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 어린 딸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딸은 온전히 다 기억하고 있었다.
고작 8살밖에 되지 않은 딸은
그래 잘한 거야.
엄마는 이곳에 오면 안 돼.
엄마는 나를 잊지는 않을 거야
라며 눈물을 참아가며 엄마 없는 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자기를 막아주던 그 어린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시어머니와의 지옥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남편은 몰랐다.
그녀의 고통을, 아내의 피멍 든 밤들을.
어머니는 그의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들에게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들 앞에서는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랫집 슈퍼 아저씨가
남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로 와봐야 할 것 같소.”
서둘러 집에 들른 남편은 마침내 목격했다.
막걸리 주전자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밥상은 다 엎어져있었고,
아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제야 분가를 결정했다.
그녀는 그날 처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