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상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찬란했던 시절도, 참혹했던 밤도

by 수 진

분가를 했다.

시부모님은 시골로 내려가셨고,

그녀의 남편은 아이들과 그녀를 데리고

단지가 큰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숨을 쉬었다.

큰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데

소리 내어 '하~' 하고 크게 숨을 내뱉어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더 이상 새벽에 일어나지 않았고,

매일 반복되는 지옥 같은 날들이 아니었다.

살았다..

남편은 성실한 공무원이었고

남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진급도 빠르고 모든 게 수월하게 풀렸다.

하지만 그런 탓에 시기와 질투도 많았다.

아니 뗀 굴뚝에도 연기는 피어올랐고

억울하게 청탁을 받았다는 누명을 쓰고

사표를 강요받았다.


바람막이가 되어 줄 곳 하나 없던 남편은

자신의 재능을 믿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신문사.

학창 시절부터 글재주가 있었던 남편은

카투사 군복무 시절에도 한국인 대표로

‘영자신문'에도 글을 연재한 적이 있고

공무원 시절에도 여러 분야에 걸쳐

큼직큼직한 신문사에 연재를 한 경험이 있었다.

자신이 있었고

성실하게 일하며 신문사를 키워냈다.


그녀는 이제 살았다가 아닌 정말 살만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밝은 성격과 세심한 배려심은

사람들을 항상 그녀 주위로 모이게 하였고

집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댔으며

식구들의 웃음소리와 딸아이의 피아노 소리며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는 더욱 눈부시게 빛이 나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찬란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의 신문사에서

정치 이야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 시절,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었다.
다루면 안 되는 그러한 것들이 있었다.
그 선을 넘은 결과는

모든 것을 빼앗아버렸다.


남편은 며칠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문사 일로 밤을 새우는 일은 많았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이 다 되어갈 무렵,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그녀는

일주일 만에 돌아온 남편을 마주하고

어쩌면 불길한 예감은 나를 피해 가지 않는가

오히려 자신을 탓했다.

남편은 말이 아닌 얼굴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많이 지쳐 보였고

어딘가 망가져 있었다.


“당장 한국을 떠나야 한대.. 그래도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 나는 도저히 한국을 떠날 수는 없어”


남편은 서둘러 그녀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둔 채,
고작 몇 백만 원을 들고 제주도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그 돈으로는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었다.

어느 귤 창고 같은 곳을 어렵게 빌려

매트를 얻고 여러 살림 가지들을 얻어

그래도 다섯 식구가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으로 만들어냈다.


남편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신혼부부들의 운전을 해주고 사진을 찍어주고

하루의 팁을 받아 들어왔다.

힘들다는 말 자체도 사치였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육지 사람에 대한

제주도의 텃세는 심했고,

그곳에서의 모든 삶은 낯설었다.


2년쯤 버티며 살아왔을 때쯤

남편의 특유의 성실함과 생활력으로

번듯한 사무실도 얻게 되고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식구들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바다들을 보러 다니기도 하고

신선한 회며 해산물이며 맛있는 과일들이며

마음껏 배불리 먹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며 언제 이곳이 낯설었냐는 듯

제주도의 생활이 익숙하게 되는 그런 날이 왔다.


창문 밖으로 용두암이 보이는 해변가에

고급 맨션을 이 아비가 짓게 될 거라 했고

아이들과 그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이 묻어 나왔다.


그러나

사기였다.

믿었던 동업자에게 그동안 모아 왔던 재산을 날렸다.

땅 주인이 왔다.

왜 남의 땅에 허락도 없이 공사를 하고 있냐 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 내밀었던 모든 문서들이며

소개받은 사람들이며 모든 것이 다 가짜였다.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그녀와 아이들은

빚쟁이들의 독촉 속에 그대로 남겨졌다.


그날은

딸아이에게는 평생을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딸이 중학생이 되었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딸이 가장 좋아하는 갈비를 만들어주고

같이 목욕탕을 갔다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딸은 오랜만의 개운함에 너무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그러다 그녀는 울음을 참아가며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일 어디 좀 가야 해. 당분간 오빠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


딸은

입안이 말라붙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을 잘 알기에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엄마를 끌어안고 울었다.

울면 엄마가 더 힘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참아지지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전 딸은 그녀에게 말했다.

“엄마 딱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그날,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은 조용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설마.. 설마.. 아니겠지..

온 집을 방문을 창고를 다 뒤져가며 엄마를 불러댔고

그 큰집은 텅 빈 채 울부짖는 딸의 목소리만 울렸다.

엄마는 없었다.


딸은 며칠 밤낮을 울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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