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없는 시간, 그리고 다시 만난 엄마
엄마가 떠난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이후로 세상이 달라졌다는 건 분명했다.
하루하루가 평범하고 조용한 날인 듯했지만
잔인한 날들이었다.
여느 일상처럼
아침에는 학교에 갔고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오빠들과 밥을 챙겨 먹고
조금 울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은 아니었다.
가끔, 이모라 불렀던 아줌마들이 찾아왔다.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내게 다가와 부드럽게 말하며
엄마, 아빠의 연락처를 말하라고 재촉했다.
낯선 손길, 낯익은 협박.
학교 교문 앞에도 누군가 서 있었다.
엄마 아빠 친구였던 사람들.
하지만 지금은 우리를 찾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모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 나왔다.
저 사람들이 나를 미행하고 있다는 걸
친구들이 알아차릴까 봐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저들이 눈치챌까 봐.
그렇게 매일을 조용히, 살얼음판 위에 살았다.
두 달쯤 흘렀을까.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막 나서려던 찰나
멀리서 낡은 작은 차 한 대가 보였다.
그 작은 차 안에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그 틈 사이로 보인 한 얼굴.
엄마였다.
놀랍고 반가웠지만, 눈조차 크게 뜰 수 없었다.
여전히 교문 앞엔 빚쟁이들이 서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지 못하고
그저 모른 척 돌아섰다.
학교 앞 슈퍼에도 들르고,
일부러 골목 사이사이를 돌고 돌아
가능한 오래 시간을 끌었다.
작은 차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다.
드디어,
교문 앞에 서있던 그 사람들도 포기하고 돌아선 후
나는 저만치 멈춰서 나를 기다리던 작은 차에 올랐다.
문을 여는 순간
엄마는 나를 끌어안았고
엄마와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울었다.
차는 제주도 어느 산속 깊은 곳으로 향했다.
나무가 울창했고, 인적도 없는 깊은 산속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 작은 집 하나.
방이 아닌 작은 공간에 나무로 침대를 만들고
이불 몇 장을 포개 놓은 그런 집이었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
엄마가 사라졌던 그날,
엄마는 죽을 결심으로
숲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약봉지를 꺼내 모조리 삼켰고,
그대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산속 깊은 곳에 이 작은 집이 있었고
가끔씩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우연히 엄마를 발견했고,
기도와 간호 끝에
겨우 엄마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한다.
정신이 들자 엄마는
막내딸인 내가 가장 먼저 생각났고
그 빚쟁이 속에 아이들만 남겨두었다는 사실에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오빠들은 학교 선생님들께 부탁을 하여
선생님 댁에 며칠만 머물 수 있게 부탁을 하고
딸인 나는
어떻게든 엄마가 데리고 와야겠다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를 데려왔다.
어른들 4명이 겨우 발만 뻗을 수 있는
이 작은 수도원에.
어릴 적 내가
등 떠밀어 도망가라고 보냈던 엄마는
이번에도 나 때문에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또 한 번 다짐을 했다.
엄마는 나만 아니었어도 훨훨 날 수 있었을 건데
어린 나 때문에
이렇게 또 어두운 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엄마한테는 너무 미안하지만,
엄마가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마웠다.
그 후 며칠간,
그 산속에서 우리는 숨어 있었다.
숲과 바람 소리,
그리고 웃는 엄마의 얼굴.
짧은 평화였다.
며칠 뒤, 엄마와 나는 작은 가방 하나씩만 들고
아빠의 친척이 있는 경기도 어느 시골로 내려갔다.
첩첩산중에 불빛이 비추는 집 몇 채,
버스는 하루에 한 대뿐.
학교를 가려해도 걸어서 한 시간은 넘게 걸어야 했다.
정말 책에서나 읽어본 적이 있던가
아직도 지금 이 시대에 이런 시골이 있구나
싶을 정도의 산골이었다.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입었던 학교 교복을 그대로 입고
새 학교를 다녔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에서 왔건, 서울에서 왔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누군가가 전학을 왔다는 것이었다.
중학교가 그 근처에서는 이 학교 하나였기에
산골치고는 학생이 제법 많았는데
이 학교에서 나는 신기한 인물이었고
전교생이 구경하듯 보러 와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을 잡아댔다.
제주도 사투리를 써보라 시키기도 했고
서울말을 쓰자 뭐가 어떻게 된 거냐며
우리 집의 역사를 물어보기도 했다.
너무 추운 겨울이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굣길에
산을 넘어야 했는데 볼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빠는 항상 나를 태워줬는데..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 막둥이 힘들다고 걷게 하지 않았는데
다리가 아파.. 너무 추워..
한 참을 걸어도 걸어도 산길은 멀고 무서웠다.
집이 가까워오자 눈물을 닦았다. 울면 안 된다.
엄마한테 나의 힘듦을 보이면 안 된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힘이 드실 테니.
그렇게 엄마와 나는
나름대로 적응해 가며 참고 조용히 버텼다.
하지만 그곳 역시 우리를 반기지 않았다.
“차라리 술집이라도 나가서 돈 좀 벌어와.”
엄마에게 친척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엄마가 그럴까 봐.
정말 그렇게 될까 봐.
결국 엄마와 나는
밤중에 도망치듯 다시 그 집을 나섰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엄마가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다는 언니 집뿐이었다.
새벽에 도착한 그 이모 집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따뜻한 밥 냄새와 위로의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잘 왔다 잘 왔어. 아무 걱정 말고, 있고 싶을 만큼 있어도 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겨울 속 난로 같은 시간이었다.
모처럼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우리 모녀는 오래 잠을 잤다.
그 이모네에서 자신들이 세를 주고 있던 방 한 칸을
임시로 빌려줬다.
아빠가 올 때까지 그냥 있어도 된다면서
정말 우리가 몸만 들어가 살 수 있도록
방을 마련해 줬다.
이모네가 반찬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이모부가 생선을 가져다주기도 했는데
이모부가 가져다 주신 병어 한 마리를 꽁꽁 얼린 다음
먹기 전에 살짝 녹인 후에 썰어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꼭 쥐포같이 생긴 모양이었는데
뼈까지 씹어 먹어도 너무 맛있던
그 살짝 얼린 병어회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생각이 났다.
엄마랑 병어회 서너 점을 썰어 초장에 찍어먹고
다시 냉동실에 넣어두면서
"우리 또 내일 썰어먹자"
이 병어회 서너 점으로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다.
이모부는 그 동네에서 큰 고물상을 하셨는데
엄청 구두쇠라며 이모는 만날 엄마한테 투덜대셨다.
하루에 딱 하루 먹을 식비만
식탁 위에 올려두고 나가신다며
커피값도 안 주신다고 투덜대셨지만
엄마와 내가 고물상에 놀러 가는 날에는
항상 짜장면을 시켜주셨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학교는
다른 교복을 입었어도 외계인 취급을 하지 않았고
서로 자기가 입던 교복 있다며 체육복도 사지 말라며
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선생님도 따뜻했고 친구들도 따뜻했다.
엄마와 나는
아무 가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병어회와 짜장면 한 그릇에 행복했던
이때가 좋았었다고 지금도 이야기를 한다.
그즈음,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를 떠난 사이 일용직으로 라도 돈을 조금 모아
사람들을 만나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하셨다고 했다.
같이 다시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아빠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가족은 다시 모였다.
다시, 처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