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익명 속으로
'(알 수 없음)님이 나갔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는 무심하고 냉정한 단 한 줄의 문장이다. '문자를 주고받은 지 벌써 일 년은 넘었지 아마?' 근래에 소식이 끊긴 친구의 근황이 궁금해서 손끝으로 SNS창의 화면을 아래로 쓸어내려 보지만 그녀의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의 반복 끝에 낯선 문구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알 수 없음'이라니. 일순간 마음에 찬 바람이 분다.
2년 전 가을, 친구 미라가 오랜만에 고국을 찾았다. 몇 년 만에 만나도 늘 밥이나 먹고 차나 마시며 사소한 안부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던 우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좀 더 특별한 기억을 만들고 싶었고, 마침내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학창 시절에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미국에서 온 미라는 한국의 가을이 주는 설렘 때문인지, 유난히 들떠 있었다. 미라는 멋진 풍경 앞에서도, 이름 모를 시골 식당에 앉아 있을 때도, 연신 감격스러운 듯 감탄사를 쏟아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있는 곳이 많은 줄은 정말 처음 알았어. 음식은 또 어떻고! 너희들이랑 같이 여행하게 돼서 너무 기뻐.”
미라의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차 안에서도, 식당에서도, 종일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쉼 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길 안내를 담당한 친구가 장소를 설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미라가 말을 독점하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혹시 교수님이세요? 오늘 강의 정말 잘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떠들썩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숙소에서도 이야기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첫사랑과의 아련한 추억부터 지금의 남편과의 첫 만남과 연애, 그리고 결혼 후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 이야기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흥미진진한 연애 소설 같았다. 떠올려 보면, 예전의 미라는 말수가 적고 유난히 깔끔했고 까칠했다. 나이는 같았지만,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있어 늘 언니처럼 느껴지던 친구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솔직하고 유쾌하게 변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어쩌면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그 누구보다 간절했고,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그 밤의 미라는 다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냈다.
꿈결 같던 여행이 끝나고, 그녀를 호텔에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즐거웠다. 이 여행이 내 마음에 두고두고 남을 것 같아. 우리 내년 봄엔 유럽에서 다 같이 만나면 어때?”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마치 이슬이 맺힌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 눈빛이 왜 그렇게 간절하고 슬픈 빛을 띠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는 끝내 다음 여행의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날짜는 다시 채팅방에서 정하자."는 그 막연한 약속만 남긴 채,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우리들의 채팅방에는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이 오갔고, 짧고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어느새 각자 자기만의 일상으로 흩어졌고, 그렇게 무심히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계절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어느 날, 미라에게서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고 싶고 그립다. 부족한 나를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
그다음 이어진문장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할게.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는 절대 나한테 연락하지 마. 알았지?’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문장 끝마다 단호하게 찍힌 마침표들. 예전 그녀의 성격처럼 똑 부러지는 말투가 가슴을 콕콕 찔렀다. 나는 휴대폰을 꼭 쥔 채, 오래도록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때 호텔 문 앞에서 보았던, 그녀의 촉촉했던 눈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미라에게 문자를 보내도, 전화를 걸어도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바다 건너 멀리 그녀에게 당장 달려갈 수도, 대신 소식을 전해줄 누구도 없어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뿐이었다. 며칠이, 몇 주가, 그리고 몇 달이 지나도 메시지 옆에는 여전히 ‘읽지 않음’을 의미하는 ‘1’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그 숫자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자리처럼 나를 붙잡아 두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문장들을 천천히 읽는다. 달팽이의 더듬이보다 민감한 친구의 자존심이었을까. 그녀의 마지막 문장을 붙들고 되뇌어 보아도, 결국 다가오는 건 서운함 뿐이다. 술래가 되어 전봇대에 이마를 대고 큰소리로 읊조리는 사이, 몇 발짝씩 내게 다가서던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까이, 더 가까이 있을 대는 서로에게 취하여 눈이 먼다. 고향도 아닌 먼 타국에서 누구보다 세상과 한 판 오지게 붙어보며 잘 살아가는 친구가 자랑스러웠는데, 지구 어느 모퉁이에 친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는데.
그녀가 머물던 자리에 가을 낙엽처럼 흩어지는 '알 수 없음'이라는 네 글자가 처연하다. 내가 그녀를 알았던가, 아니 알고 있었던 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인다. 그녀의 이름이 사라진 대화창이 남긴 공백은, 단순히 이름 하나가 사라진 빈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이어주던 수많은 순간들과 나눌 수 있었던 미래의 이야기들이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그녀의 이름이, 그녀의 표정이,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다가오며 다시 사라진다..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의 화면 속에 '알 수 없음'이란 이름으로 남게 되리라. 나는 그 단절 앞에서 어떤 '작별'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함께 했던 기억이 주름 잡힌 시간처럼 한 곳으로 밀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