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끝 어딘가에서

하얀 거짓말

by 솔내음

"엄마! 엄... 마!"

허공을 가르는 비명이 메아리도 없이 흩어졌다.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새벽 공기뿐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 기숙사의 천장은 낯설고 높았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 어느덧 4년. 방학마다 고국을 오가는 동기들을 부러워하며 '다음엔 꼭'이라 다짐했던 기약 없는 약속이 쌓여가는 동안, 강철 같던 엄마의 몸속에 병마가 똬리를 틀었다는 소식이 겨울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그리움보다 두려움이 앞선 귀국길이었다. 우리 집의 상징인 노란 대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문틈 사이로 환한 미소를 띠며 달려 나오는 엄마가 보였다. 하지만 내 시야에 들어온 엄마는 예전의 당당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부쩍 가늘어진 팔다리, 그리고 은행잎처럼 창백하고 노란 안색. 그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개성이 고향인 엄마는 특별한 날이면 늘 직접 반죽을 밀어 만두를 빚곤 했다. 그날도 엄마는 아픈 몸을 이끌고 둘째 딸을 위한 만둣국을 올렸다. 돼지고기와 숙주, 김치가 어우러진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자, 뜨거운 육즙과 함께 억눌렀던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만두 하나하나에 담겼을 엄마의 고단한 사랑을 나는 감히 삼키기조차 미안했다.


도착 이튿날부터 시작된 병원 생활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정밀 검사 결과는 참혹했다. 우리 가족은 입을 맞췄다. 마음 여린 엄마에게 '암'이라는 단어는 너무 가혹하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우리 중 누구도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수술 당일, '수술 중'이라는 초록색 표시등은 30분도 채 되지 않아 허무하게 꺼졌다. 복도에 울려 퍼지는 보호자 호출 방송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보호자 한 분만 들어오세요."


수술실 안, 의사는 메스를 대보지도 못한 채 닫아야 했던 엄마의 속을 보여주었다. 온몸으로 퍼진 암세포는 드라마 속 비극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회복실에서 눈을 뜬 엄마는 아이 같은 눈빛으로 희망을 물었다.


"수술은... 잘 된 거지...?"


"네, 엄마. 아주 잘 됐대요."


참담함을 누른 채 뱉은 나의 거짓말은 덤덤해서 더 잔인했다. 엄마는 그 말을 믿고 안간힘을 다해 재활에 매달렸다. 기적이라는 신기루를 쫓으며 나는 진실을 말할 기회를 자꾸만 뒤로 미루었다.


독한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우아했다. 어느 오후,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던 나는 열린 병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낮은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제 상태는 좋아지고 있나요? 희망은... 있는 건가요?"


링거액을 갈아 끼우던 간호사에게 묻는 엄마의 질문이 차가운 공기 중에 부유했다.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자식들이 건넨 서툰 거짓말을 기꺼이 받아내며, 엄마는 홀로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얼어붙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미국 학교에서는 복귀를 재촉하는 메일이 쏟아졌다. 아픈 엄마를 두고 떠나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일 같았지만, 한편으론 어렵게 쌓아온 나의 커리어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어서 가서 한 학기만 마치고 오라'는 아버지의 권유는 내 이기심을 정당화해 주는 면죄부가 되었다. 나는 나를 위해,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가면 언제 또 보려나..."


떠나는 날, 휠체어에 앉은 엄마의 쓸쓸한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 팠다. 나는 차마 엄마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공항으로 향했다. 그것이 마지막 뒷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미국에서의 시간은 죄책감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다시 귀국을 준비하던 어느 새벽, 정적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자, 멀고도 가까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간다..."


"엄마! 어딜 가요?"


"어딘 어디야... 외국이지."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그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그것은 엄마가 내게 남긴 마지막 안부였다.


7월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김포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낯설고 시렸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에도, 스쳐 지나가는 바람 끝에도 엄마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외국 간다.'


바람이 속삭이는 듯했다. 엄마는 내가 있는 이곳 어딘가로, 혹은 내가 가보지 못한 아주 먼 나라로 먼저 여행을 떠난 것뿐이라고. 그렇게 엄마는 그 낯선 길 끝 어딘가에서, 못난 딸이 오기를 변함없는 미소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