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기억의 그 아이

by 솔내음

템스 강은 햇살을 받아 은빛 리본처럼 잔물결을 흩뿌리고 있었다. 타워브리지 근처 도보길, 사람들의 시선은 자꾸만 내 곁을 걷는 한 존재에게 머물렀다.


부드럽고 긴 갈색 털을 바람에 흩날리며 우아하게 발을 내딛는 그녀, 호야. 햇살이 내려앉은 호야의 털끝은 황금빛으로 타올랐고, 그녀의 그림자는 내 발끝에 머물며 온기를 전했다.


“Gorgeous!”

“Stunning!”


낯선 이들의 감탄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하지만 호야는 그 모든 찬사에 무심한 듯, 오직 나만을 바라보며 깊고 고요한 까만 눈동자로 세상의 숨결을 읽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이자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나란히 템스 강변을 걸었다.


산책을 마친 뒤, 우리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유리벽 너머로 런던의 상징인 타워브리지가 낮은 저음처럼 묵직하게 울리고 있었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른 김이 바람에 섞여 사라지던 평화로운 찰나, 정적을 깨고 한 대의 휠체어가 다가왔다.


회색 머리칼이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리는 노신사였다. 그는 팔과 상체를 벨트로 고정한 채, 한 청년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호야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평소엔 점잖은 아이였지만, 휠체어의 금속성 움직임이나 낯선 이의 급작스러운 접근에 호야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계심이 서린 내 손길을 느꼈는지 호야도 귀를 쫑긋 세웠다.


휠체어가 내 옆에 멈춰 섰다. 노신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이 아이...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그의 낮은 음성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경계심을 단숨에 녹여버리는 따뜻하고도 절박한 온기.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휠체어를 밀던 청년이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내 호야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와 함께 화면에 담긴 호야의 모습을 본 노신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뚫어지게 화면을 응시하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옛날에... 나와 함께 살던 우리 아이와 너무나 닮았어요.”


그는 말의 끝을 잇지 못했다. 눈가에는 감춰지지 않는 빛이 번졌다. 그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오래된 그리움의 파편이었다.


그 순간, 주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타워브리지를 지나는 차들의 소음도, 카페의 배경음악도 먼지처럼 흩어졌다. 오직 노신사의 시선만이 호야의 갈색 털끝에 머물러 있었다. 그 눈빛은 한때 자신을 지탱해 주던 가장 소중한 사랑의 흔적을, 생의 막바지에서 다시 마주한 자의 것이었다.


비 오는 날 함께 걷던 공원, 손끝에 닿던 보드라운 체온, 이름을 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던 그 생생한 감각들... 그 모든 기억이 2차원의 사진 한 장 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덮치고 있는 듯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노신사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강물 위로 부서지는 햇살 속으로 스며드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바람이 다시 우리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호야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말보다 깊은 대화가 담겨 있었다.


사진 한 장.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상실이 남긴 시간의 간극을 넘어, 사랑은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호야는 그 노신사에게 있어 잃어버린 계절의 잔향이었고, 다시 만난 구원이었으리라.


나는 떨리는 손으로 호야의 목줄을 다시 고쳐 쥐었다. 타워브리지를 건너는 길 위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호야의 흰 목덜미 털이 자유롭게 흩날렸다. 문득, 지금 우리가 함께 걷는 이 길, 이 평화로운 공기가 언젠가 나에게도 저 노신사의 그리움처럼 '영원히 간직된' 사랑의 증거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나는 그 찬란한 예감을 붙잡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작은 소리가 런던의 공기 속에 퍼졌다.


빛이 렌즈를 통해 필름 위에 스며들고, 도망치려던 시간이 그 위에 눌러앉았다.


먼 훗날, 내가 이 사진을 다시 펼쳐 보게 된다면, 템스 강의 바람과 노신사의 젖은 눈빛, 그리고 내 곁에서 숨 쉬던 호야의 온기를 기억해 낼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끊임없이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던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이 프레임 속에서 영원히 호흡하고 있을 테니까.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흘렀고, 타워브리지는 우리의 이야기를 묵묵히, 그러나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