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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사는 로젠 Dec 06. 2023

07_노을

 ㅣ각자내기가 당연한 한국사람 나ㅣ


     부산 여객터미널로 가기 전에 멀더는 '은행(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그가 돈_현금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 카드는 없었다. 불과 하루가 지났는데 돈을 찾는다고? 다음 순간 설마 나에게 많이 기댈 생각은 아니었겠지?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사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현실적으로 내가 그보다 나이가 큰누나만큼 많은 데다, 직업을 가진 선생님이 동행해 주었으니까.  그런데 너는 미국 뉴요커잖아? 당시 대박치고 있던 <프렌즈>에 나오는 바로 그 뉴요커 New Yoker가 설마 나에게 여행 경비를 기댈 궁리를 했을까...

   우리는 거제도로 가는 배를 탈 예정이었다. 내가 그에게 돈을 받아서 각자의 표를 사고 거스름돈을 주려고 하니 받지 않겠다고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어젯밤에 피자값을 내가 지불했기 때문이란다. 전날 밤에 피자값을 내가 내었는데, 그 반을 돌려준다는 의미다. 훗. 나는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았으나 우리 사이에 각자내기는 원칙으로 한다는 것을 2500원짜리 국밥을 먹을 때부터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멀더가 타지에 나와있는 아직은 앳된_한국 같았으면 대학 복학생 정도의 신세였으나, 유학생도 아니고 엄연히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각자의 몫은 각자가 부담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었다.   

    제이슨이 신문사의 한국 사람들, 특히 누나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그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분식집에서 돈을 낼 때마다, 부산에서 첫날 아침에도 커피숍에서 자기가 커피를 주문하고 받아오겠다길래 나는 내 커피값만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딱히 나에게 노골적으로 티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그 순간에 딱 한번 제이슨은 내게 '한국 사람 같지 않다'라고 했다. 푸하하하하하.  


   거제도를 가는 배 안에서 멀더의 배낭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는데, 배낭이 반이나 열려있고 그 안에 검정 비닐 봉지가 벌어진 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몸을 기울여 들여다 보니 검정 비닐 봉지 안에는 한국어 단어를 쓴 작은 카드가 잔뜩 들어 있었다. 껌종이만 크기의 낱낱의 단어 카드에는, 시골 할머니들이 막 한글을 배우는 시기에 쓴 듯한 어색한 한국말이 쓰여 있었다. 얼핏 봐도 몇백여 장은 돼 보였다. 아니 이걸 한 묶음씩 고정시키라고 링을 같이 주지 않니. 이게 무슨 콩나물도 아니고! 라고 중얼거리며 비닐 봉지를 묶고 열려있는 배낭도 자크를 채웠다.  멀더를 돌아 보니 책은 무릎에 올려져 있고 조는 듯 자는 듯하길래 자니? 책을 읽니? 라 물었더니 "both (둘 다)"란다.  아침 햇살이 일렁이는 물결 위에 반짝거렸고 눈이 부셨으나, 그가 써놓은 한국어가 나에게 준 눈부심은 그 이상이었다. 


 ㅣ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만들었나요.ㅣ     


    엉겁결에 가게 된 거제도였다. 멀더는 부산에 간 김에 가까운 거제도와 통영을 거쳐 순천까지 개인 여행 일정을 잡았고, 나는 시간상 통영까지만 동행하기로 했다. 거제도에서 해금강을 보고 싶다고 하여 고현 터미널로 들어갔으나 버스 편이 없어서 또 헤매고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이번에도 아주머니 한 분이 저구라는 곳에 가서 다시 해금강을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작아서 어딜 가도 눈에 띄지 않는 편인데, 키 큰 외국 사람이 멀뚱 거리고 있으니 아주머니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오신 후에 해결책을 주시고는 가던 길 가신다.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길은 아주머니로 통한다. 차를 놓칠까 봐 먼지 나는 의자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시골 버스들이 차를 대고 나가고 하는 먼지 나는 작은 터미널 의자 앞에서 멀더는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잘 웃었다.  처음 어학카페에서 만났을 때는 고개를 잘 들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물어보고는 싶었다.  


   해금강은 거제도 남쪽을 가로질러 그 끝에 있었다. 저구에서 해금강 가는 작은 버스. 멀더의 머리가 버스 천정을 뚫고 나갈 지경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해질 무렵이고 버스 안은 막차여서 사람이 많았지만 묘하게 조용했다. 누가봐도 키큰 이방인이 구부정하게 서있었지만 멀더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무엇이었을까. 차창 밖 멀리 낮은 산등성이 능선을 따라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그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노을.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만드셨나요. 멀더도 반할 수밖에 없는 풍광. 내가 붉은색 띠 노을을 가리키며 한국말로 ’노을‘이라고 하자 그는 영어로 뭐냐고 물었다. 내가 단호하게 노을은 영어로도 그냥 노을 이라고 했다. 또 그럴 리가? 하는 의아한 표정을 날 내려다본다. 내가 말했다. 100%. 제이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냥 선셋(sunset) 정도? 노을은 그냥 노을이다. 조금 있으면 사전을 꺼내 보라 할 태세였으나 거기까지는 가지 않고 붉게 물드는 저녁놀을 홀린 듯이 바라보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 덕분에 해금강까지 오게 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돼서 고맙다'는 말은 쏙 들어갔다.       

 


                               

    통영에서 어딜 가보고 싶냐니까 이제는 나보고 싶은 곳 아무 데나 하길래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끌고(?) 충렬사로 향했다. 충렬사는 이순신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의 남쪽 바다는 거의 다 이순신의 승전지여서 이순신을 기념하는 곳은 많은데, 충렬사는 조금 특별하다. 충렬사의 바닥은 박석으로 깔렸다. 박석은 임금의 궁궐에만 깔리는 돌이다. 2003년, 말로만 듣던 충렬사를 그렇게 나는 외국인과 가게 되었고 향로에 묵념만 하고 나왔다. 묵념을 하고 있는데 뭔가 뒤에서 둔하게 찰칵 소리가 들린다. 멀더의 일회용 필름 카메라 소리다. '쟤는 왜 남의 뒷모습을 찍니...그날 나의 뒷모습을 찍은 필름카메라 사진을 10년도 더 지난 2017년 어느 날 구글 공유 폴더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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