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서른이 넘은 지금에야 비로소 크게 다가오는 사실 중 하나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과 때문에 기록하지 않는 기억들은 굉장히 쉽게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당장 지난달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고,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어서 좋은 점은 나쁜 기억을 오래 담아두지 않고 흘려보낸다는 것이고, 같은 맥락에서 나쁜 점은 좋은 기억 또한 함께 흘러나간다는 것이다.
망각의 동물로서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 공평하게 흘러 보내면 좋겠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나쁜 생각을 오래 담아두는 편이다. 그래서 15년 전 친구에게 화냈던 일을 아직까지 후회하고, 밤마다 남들이 내게 무신경하게 뱉어낸 말들을 곱씹으며 자존감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이런 반쪽짜리 망각 인간이기에 내게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야 나쁜 기억만큼이나 좋은 기억도 종종 꺼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 10월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를 끝내기 전 작은 수첩에 그날 어떤 일들이 있었고, 나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간단히 적는다. 분명 좋은 기억을 꺼내보기 위해 쓰기 시작한 일기지만 어째 쓰고 보니 우울한 이야기 투성이인 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매번 연말이 되면 '벌써 1년이 지났다고?'라는 생각이 들지만 1년 365일은 꽤나 긴 시간이고 긴 시간만큼이나 개인에겐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기록하지 않는 기억들은 쉽게 휘발되기 때문에 한 해를 곰곰이 곱씹어 보고자 글을 쓴다. 아 그리고 기록의 좋은 점은 시간이 지났을 때 쌓인 기록들이 꽤나 재밌는 콘텐츠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 내년 이 시기에 나는 분명 이 글을 보기 위해 이곳에 들어올 것이다. 그때의 내가 이 글을 재밌게 읽길 바라며 올해의 회고를 시작해 본다.
올해 내게 있었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이직이다. 사실 이직에 대한 고민은 작년부터 계속 있었다. 그럼에도 선뜻 퇴사를 결심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래도 아직 내가 이 회사에서 더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이 무색하게 시간이 지남에도 나의 업무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더 이상의 정체감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첫 직장이었고, 인턴부터 입사해 3년을 다녔던 회사였던 만큼 애정을 갖고 있는 회사였기에 퇴사한 지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퇴사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새 직장은 이전보다 규모는 줄었지만 전 직장에 비해 업무 기회가 훨씬 열려있는 편이라 아직까지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보고를 위한 보고용 페이퍼 워크가 아니라 실질적인 액션을 위한 데이터 분석이나 내부 전략 아이데이션에 업무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게 참 즐거운 일이라는 걸 이곳에서 새삼 느끼고 있는 중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초기 스타트업이라 그런지 팀으로 일하는 문화가 잘 자리 잡혀 있지 않다는 것. 나름의 팀 구분이 있긴 하지만 다소 형식적인 구분일 뿐 사실 팀으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협업 문화가 잘 갖춰져 있던 전 직장과 비교했을 때 체감이 크게 되는 부분인데, 지금은 현 직장에서의 팀워크까지 잘 만들어 가는 걸 내 업무의 일환으로 생각하려 하고 있다. 내년 회고 때는 달라진 팀 문화에 대해 쓸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그때까지 다니고 있겠지...?)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분들과는 퇴사 후에도 종종 만나며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퇴사 후에 모른 채 할 만도 한데 그래도 잊지 않고 한 번씩 나를 불러주시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만약 고민 끝에 퇴사 결심을 번복했다면 그건 분명 함께 일하는 동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께 고민하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각종 커뮤니티에 괴담처럼 올라오는 직장 내 빌런 썰들을 볼 때마다 딴 세상 이야기라며 웃어넘길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마냥 즐겁게 일하고 있는 것처럼 쓰긴 했지만 사실 누구나 그렇듯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한다는 건 역시나 쉽지 않다. 입사한 지 3개월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야 그나마 조금 적응을 했다는 생각을 한다. 25년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업무를 주도하고 팀을 리드할 수 있게까지 되길 바라본다.
겨우내 잠시 멈췄었던 러닝을 4월부터 다시 시작했다. 목표로 했던 10km 마라톤은 나가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10km 달리기(+ 15km까지!)는 성공했다. 뭐 본질이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뒤로 갈수록 조금씩 뛰지 않는 날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빠짐없이 뛰었다는 사실에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다. 앱에 기록된 거리를 확인해 보니 올해에 누적 약 300km를 뛰었더라. 군대 있을 때 빼고는 달리기라고 해본 적 없는 나였기에 300km라는 숫자가 꽤나 의미 있게 다가온다.
러닝을 하며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나의 페이스'를 알고 이를 유지하는 게 달리기에 있어서나 내 삶에 있어서나 꽤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엔 잘 뛰는 사람도 많고 더 나아가 나보다 잘난 사람은 더 많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스스로 한없이 위축될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원래 페이스보다 속도를 오버하게 되는데 이러면 꼭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나더라. 요새는 그래서 내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느린지 남과 비교하며 평가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자주 하려고 노력한다.
내년에도 나는 아마 계속 달릴 것이다. 일단 호기롭게 4월에 열리는 하프 마라톤을 신청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호기로웠나 싶기도 하지만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을 때의 나를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설레기도 하다. 기왕 뛰는 거 잘 뛰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언제나 기록보단 완주를 목표로.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뛰어야지.
작년부터 배우기 시작했던 베이스는 이제 내 삶에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의 기둥이 되었다. 올해 수 없이 밀려왔던 우울의 시간들을 나는 베이스를 부여잡고 버텨낼 수 있었다. 죽어도 안될 것 같은 라인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베이스를 매개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합주를 하고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그냥 방 안에 앉아 좋아하는 곡에 맞춰 베이스를 연주하는 시간 동안 나는 밀려왔던 우울 속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었다. 아마 베이스를 치지 않았다면 더 긴 시간 동안 별 것도 아닌 일로 스스로를 갉아먹었을 것이다. 내 삶에 베이스라는 레이어가 한 겹 더해진 만큼 나라는 사람도 조금 더 두꺼워졌다는 생각을 한다.
첫 공연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시작은 201p에서 진행하는 BANDER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의 밴드원들을 처음 만났고 약 두 달간의 합주 끝에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마냥 올려다보기만 했던 무대에 오른 경험은 꽤나 특별했다. 하지만 첫 공연이 끝났을 때 나는 뭔가 굉장히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조금은 멜랑꼴리 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분명 사람들의 호응과 환호 속에서 도파민이 밀려오는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던 연주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당연히 첫 술에 누가 배부를 수 있겠냐마는 잘하고 못했고를 떠나 적당히 타협하며 연습했던 지난 내 모습들이 후회됐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도 뒤로 하고 집으로 곧장 돌아간 나는 자기반성의 의미로 새벽까지 베이스를 연습하다 잤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빨리 첫 공연의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201p 당시 같이 공연했던 팀원들과 뜻이 맞아 같은 멤버로 5월에 한 번 더 공연을 하기로 한 것. 다음 공연은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요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연습 중이다. 다음 공연 후기를 기대하시길. (나한테 하는 말)
올해는 예년에 비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은 해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고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 우울하고, 언제 행복한가? 생각보다 중요한 질문이다. 이걸 잘 알고 있어야 우울한 순간은 줄이고 행복한 순간은 늘릴 수 있다는 생각을 올해 들어 처음 하게 됐던 것 같다.
고민 끝에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나의 행복과 우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는 인간관계에서의 나라는 사람의 효용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의미 있는 사람이구나를 체감할 때는 행복했고, 그렇지 못할 때는 우울했다. 여기서 문제는 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상대가 아니라 나라는 것인데, 상대가 나를 얼마나 좋게 생각하든지와 관계없이 내가 이를 체감하지 못한 순간엔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래서 같은 사람을 만나도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굉장히 대중없는 상황들이 많았달까... 이렇게 보면 아직까지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 기분이다.
이 고민은 아마 25년에도 계속 가져가게 될 것 같다. 25년에도 나를 좀 더 들여다보고 내 주변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더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빼는 그런 시간들을 많이 가지고 싶다.
올해는 조금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과 내가 지금보다 잘할 수 있는 건 더욱 성실해지는 것이지 않을까. 일도 취미도 관계도 좀 더 성실히 하다 보면 분명 새로운 성취들을 얻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바람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열려 있는 새로운 기회들에 망설임보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기를. 내년에는 더 많은 새로운 도전과 경험에 대한 내용들로 회고를 채워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