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살다 보면 지치고 힘이 든다. 우울하고 화나고 무력하다. 내가 참 작다,라고 확인시켜주는 삶이라는 힘. 그 폭력 그 권력. 해서 다정한 눈빛, 한마디 말, 부드러운 미소, 사소한 친절에 마음이 일렁인다. 마음을 빼앗긴다. 힘이 들어서 그렇다.
지금 우리는 매우 안락하고 풍요롭게 산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기 한계의 극한까지 고갈되는 삶을 살고 있다. 특히 한국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IT 강국에 살면서 선사시대 호모 사피엔스종 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고, 더 큰 위험에 처해 있다. 교통사고, 산업재해, 자살, 질병 등등. 그래도 10만 년 전 수렵채집인의 삶과 비교하면 행복한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한 대목을 보자
“이들은 사흘에 한 번밖에 사냥에 나서지 않으며 채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루 3-6시간에 불과하다. 평상시에는 이 정도 일해도 무리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칼라하리보다 더욱 풍요로운 지역에 살았던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식량과 원자재를 획득하는 데 이 보다 더 적은 시간을 썼을 것이다. 이에 더해 이들에게는 가사 노동의 부담이 적었다. 접시를 씻고 진공청소기로 카펫을 밀고 마루를 닦고 기저귀를 갈고 청구서를 납부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3만 년 전 중국의 수렵채집인은 가령 아침 8시에 동료들과 함께 캠프를 나섰다. 이들은 인근의 숲이나 초원을 오가며 버섯을 따고 먹을 수 있는 뿌리를 캐고 개구리를 잡았다. 가끔은 호랑이를 피해서 도망쳤다. 오후에는 캠프로 돌아와 점심을 준비했다. 덕분에 남는 시간에 이들은 가십을 나누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지어낸 이야기를 하면서 한가롭게 보낼 수 있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우리는 지금 이 문명이 최상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실상은 다를 수 있다. 이 과학문명은 인간에게 부품으로써의 삶을 선물하고 있는지 모른다. 농업혁명이 인류에게 풍요와 휴식을 주지 않았듯이, 산업혁명이 노동자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 않았듯이, 정보화 혁명이, 그리고 일명 4차 산업 혁명의 바퀴 속에 허둥대는 우리들 삶이 휴식과 만족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영.
그래서일까? 우리는 자연현상이든 삶의 현상이든 인간에게 위안이 되는 방향으로 이해했다. 인간에게 유익한 것, 위로를 주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싶어 했다.
니체는 ‘오류는 위안을 주는 힘이었다’고 말한다. 인간을 위로해 주는 것을 인간은 진리라고 파악했으나 실은 그것은 오류였다고 논파한다. ‘진리가 인간에게 위안을 준 것이 아니고 진리라고 믿고 싶은 ‘오류’에게서 위안을 받은 것’이었다고. 말하자면 어떤 움푹한 구멍을 인간에게 유리한 상상력으로 채워 넣고 조심조심 주위를 맴돌며 그 구멍과 그 상상력에게 복을 비는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할까?
니체는 ‘진리가 인간에게 위안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까? 진리에 대한 이의일까? 반대 증명일까?’ 하고 묻는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용한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니까 말이다. 가령 어떤 식물이 인간의 병 치료에 아무 효과도 없다면 그것은 식물이 아닐까? 즉 ‘식물이라는 진리에 대한 반증일까?’라고 묻는다.
인간은 자기를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자연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해석해왔다. 인간의 삶을 정당화시키는 방향으로, 혹은 희망적인 방향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삶의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았다. 설령 그것이 허위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불변의 가치라고 믿으며 살았다. 그러나 니체는 이 서글프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방패막이를 가차 없이 파괴해버린다. 우리의 등 비빌 언덕을 우리 등에서 제거해버리고 우리의 그토록 절절한 진리를 허위라고 단언한다. 우리의 상상력이 가짜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진실 앞에 벌거벗은 인간이 있을 뿐이다.
“진리는 괴로워하고 위축되어 있고 병든 인간의 상태와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갖기에 그들에게 유용해야만 하는 것일까? (...) 예전에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목적이라고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인식을 통해 발견될 수 없다고 가정했으며 나아가 별생각 없이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외의 것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가정했을 정도였다”
-니체, < 아침놀 424>
니체는 인간들은 ‘치료제를 구한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힘을 주고 벌떡 일어나게 하는 것, 미소 짓게 하는 것을 진리로 믿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악마일지언정 우리는 그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고 싶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다. 고갈되고 진이 빠지고 힘들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서 자연에 자신을 투사하고 자연을 나의 목적에 맞게 해석하며 위로받는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대게는 오류라는 것이다. 물론 인류는 이런 오류를 통해 자기를 고양시켜왔다. 그러나 이런 오류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 살상하는 잔혹한 역사를 남겼다고 진단한다.
“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 관여할 수 있는 자는 삶의 가치에 절망할 것이다: 만약 그가 인류의 총체적인 의식을 자신 속에서 파악하고 감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현존을 저주하면서 쓰러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은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그 속에서 위로와 의지가 아니라 회의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인간의 무목적성을 보게 될 때, 그의 눈에는 자기 자신의 활동도 낭비라는 특징으로만 보일 것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33 >
니체에게 인간은 무목적성일 뿐이다. 존재의 의미, 삶의 목적 등에 기대어 삶을 포장하는 것은 거대한 오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류가 이 사실을 알게 매우 괴로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자기 위주로 해석하는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 위 새를 보고 지치고 힘들어 보인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힘들기 때문이다.
땅에 내려온 새를 보고 외롭다고 느낀다.
내가 외롭기 때문이다.
물론 니체는 오류는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오류뿐이랴. 니체는 불공정함도 비논리적인 것도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주 삶의 공정성을 말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삶, 상식이 통하는 삶을 갈망하지만 삶은 악마적이고 냉소적일 때가 많다.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한 방향밖에 볼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괴롭다.
삶의 무목적성을 바라보는 행위. 삶의 진실을 직면할 용기. 그것은 무시무시한 삶의 공동(空洞)을 바라보는 행위이다. 그 동공(洞空)에게 축성하고 동공을 신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고 그 안으로 한 발한 발 다가가 동공을 만나는 것이다. 그 동공을 사는 행위이다. 운명을 사는 것이다.
거기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삶은 이것이 전부이므로. 다른 목적도 이유도 없으므로. 오로지 이 현존만이 있으므로. 진실을 볼 것. 운명을 사랑할 것. 무매개적인 기쁨으로 어린아이처럼 살기.
‘운명을 사랑하라’는 순종과 굴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운명을 사랑하는 삶, 자기 삶의 끝까지 쫒아가서 디오니소스적 고통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인간, 찢기고 찢기지만 계속 부활(생성)하는 인간. 그러니까 계속 생성하는 인간은 운명을 새로 구성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니체는 말한다. ‘건강한 자는 다만 유희할 뿐이다’.
뿌연 하늘에서
싸락눈이 내린다
작은 새 한 마리,
나무에서 내려온다
톡, 톡, 톡 뛰는 듯이 춤추듯이 땅을 딛는다
박새인가?
나는 작은 새를 바라본다
“나는 부당하다
나는 오류다
나는 낭비되고 있다”
느닷없이 새 한 마리 후다닥 날아간다
나는 싸락눈 내리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사라진 새를 오래오래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