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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경 Jan 13. 2019

너 자신이 되어라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올해 중학생이 된 딸아이가 뜬금없이 한복모델 선발대회에 나가겠다고 했다. 지난겨울부터 부쩍 모델 타령을 하던 아이다. 뭐? 무슨 모델?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아나운서, 승무원 등등 젊은 아가씨들이 많이 지원하는데 어찌 보면 연예인 등용문인 듯했다. 중학생이 웬 한복모델?    



접수비 10만 원만 주면 돼. 한복도 다 무료로 대여해 준대. /너 키 몇이냐?/ 162cm/ 너 몇 살이냐?/ 14살,...? / 네가 거기 왜 나가?/....../ 거기는 키 170cm 되는 늘씬한 미인들이 연예인 되려는 건데 꼬마가 왜 나가냐고?/ 아닌데... 14살부터 59살까지 여자면 다 나갈 수 있어./ 내 말은... 그러니까 작년에 14살 먹은 꼬마가 나왔냐고? 지금은 공부해야 할 나이잖아. 집에서 글자 한 줄 안 보면서. 왜 남들 안 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건데? 뭐가 될라고? 14살짜리가 누가 거기 나가? 엉?/ 나갈 거야. 나갈 거거든./ 뭐? /.../    



나는 붉그락푸르락했다. 그러나 내가 졌다. 며칠 후 접수비를 입금해주었다. 믿을 만한 대회이긴 했으나, 남들 안 하는 짓 하는 아이가 미웠다. 하지만 어쩌랴. 아직 선발 중인 남쪽 지역에 접수했다. 전체 545명이 접수했는데 그중 325명을 선발하는 1차 예심에 통과됐다고 연락이 왔다.     


2차 본선은 예심을 통과한 325명이 아름다움을 겨룬다. 아이와 나는 4월 어느 토요일 새벽 광주행 첫 기차를 탔다. 이참에 ktx를 이용해 보려 했으나 ktx도 없고 좌석도 없어서 입석을 이용했다. 3시간 40분 후 역에 도착, 택시를 타고 행사장을 향했다.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샵에서 머리 손질과 화장을 한 어여쁜 참가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딸아이는 급히 화장실에 가서 다이소 등에서 산 화장품으로 삐뚤빼뚤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하고 나왔다. 뒤를 보니 머리를 하나로 묶은 후 둥그렇게 말아 다시 묶었는데 머리카락 끝이 조금 삐져나왔으나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등록을 하고 혼자 리허설장에 들어갔다. 리허설장에는 본인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평소 한복을 입어보지 않은 14살 아이가 혼자 입을 수 있을까? 어떤 걸 고를까? 조금 걱정이 됐으나 어쩔 수 없다.     


몇 시간이 지난 후 공연이 시작됐다. 아이가 나온다. 스스로 고른 한복을 챙겨 입고 무대에 나타난 딸아이. 예쁘다! 무대 앞으로 경쾌하게 걸어 나오는 아이 표정에는 긴장 같은 건 없다. 기쁨이 넘치는 얼굴. 포즈도 자연스럽다. 팔을 들고 다소곳이 춤사위를 춘다. 미소 짓고, 한 바퀴, 반대로 한 바퀴, 몰입, 그리고 미소... 심사위원들이 집중한다. 아이는 행복해 보였으며 14세 최연소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매력을 선보인 후 사뿐히 퇴장했다. 나는 놀랐다. 아이 아빠를 안 데려온 것이 후회가 됐다. 같이 따라와 준 대가로 잔소리만 한 바가지 한 것. 나는 그것만 했는데. 저 춤의 포즈는 언제 익혔을까?  방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더니 며칠간 저 동작 연습했나 보네.    


“꺅! 아악! 엄마!  여기 와 봐! 내 이름! 여기 내 이름 있어! 꺅! 나 힐튼호텔 간다!”    


이틀 후 저녁 6시. 컴퓨터 화면에 325명 중 뽑힌 17명의 명단에 아이 이름이 떡하니 올라 있었다. 사실 그 전 5시 49분에 내 휴대폰에는 이미 결선 진출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으나, 별 생각이 없었으므로 휴대폰을 보지 못했다. 꺅! 나도 비명을 질렀다. "5월 26일 서울 그랜드 힐튼호텔 최종 결선 진출, 축하합니다."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만큼 아이를 키우는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다. 육아가 이리도 고되고 힘든 것이었나? 누구나 자식 키우는 거라지만 나는 엄마 역할이 맞지 않는 듯했다. 마흔이 넘은 노산으로 손목이 시큰거려 아기를 안아 줄 수 없었고, 체력이 달려서 놀아주지도 못했다. 아이 아빠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일에 바쁜 사람이다. 출산 백일 만에 직장에 나갔으므로 동네 아주머니에게 맡겨 키운 아기는 온갖 병에 걸리고 다치고 입원하고 수술하고 아프고 아팠다. 나는 직장은 그만두었고, 길고도 막막한 육아가 시작됐다.    


그 아이가 올해 중학생이 되었다. 건강하게 잘 자랐다. 종종 딸은 방금 멋에 눈을 뜬 사람처럼, 이제 막 마음껏 어여쁜 옷을 연출해 입을 권리를 얻은 사람처럼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본다. 엄마인 나는 종종 신기하다. 내가 무슨 복에 저리 예쁜 아이를 낳았을까? 자연 미인이란 이런 모습일 거야. (가끔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딸은 아쉬운 점이 있나 보다. 키는 좀 더 작았으면 좋겠고, 다리는 더 얇았으면 좋겠고 얼굴은 마음에 들지만 머리숱이 좀 더 적었으면 좋겠고 등등.


그런데 멋을 부리려는 딸아이와 그 멋이 튀는 것이 되어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할까 봐 나는  걱정한다.    

“치마가 너무 짧잖아. 티셔츠 색이 진하잖아. 엄마가 골라준 옷이 훨씬 예쁜데 날라리같이 이게 뭐야. 어이구 이 옷 빨리 내다 버려야지. 아니 이걸 또 왜 입어? 집에서 입으라고 마트에서 주워온 걸 입고 나가겠다고?”    


곰곰 생각해 보면 내가 결기를 부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이  걱정되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말을 상기하며 혹시 모난 돌이 될까 봐 돌다리도 두드려보며 사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풍속과 의견 뒤에 숨는다. 자신이 단 한번 유일무이한 존재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또 어떤 이상한 우연도 두 번씩이나 그토록 기이하게 다채로운 갖가지를 뒤흔들어 섞어 그 같은 하나의 존재로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나쁜 마음인 것처럼 그걸 숨긴다. 

-니체, <반시대적 고찰> 중    


왜 사람들은 그것을 숨기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까?

니체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습을 요구하고 온통 인습에 휩싸여 있는 이웃이 무서워서’라고. ‘무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서 눈치 보며 그 속에 숨어버리는 삶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가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각진 부분을 잘라버리고 모난 부분을 갈아 없애며 울퉁불퉁한 어떤 특성을 평평하게 만든다. 비슷비슷한 모양새로 비슷비슷한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두려움과 함께 니체는 또 게으름을 들고 있다. 사람들은 편안함을 좋아하고 자신에게 닥치는 정직성과 솔직함을 살아낼 자신이 없다. 습관에 젖어 관성에 따라 살고 싶은 사람들. ‘인간은 겁도 많지만 무엇보다 게으르다’는 것이다.    


“대중에 속하지 않으려는 인간은 자신에게 반(反)해서 편안해지려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다.  “너 자신이 되어라! 네가 지금 행하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모두 네가 아니다!”라고 그에게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면 된다.”-니체, <반시대적 고찰> 중    


너 자신이 되어라.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생각하곤 했다. 너 자신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 나라는 것의 실체가 있나? 인간은 변화하는 존재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다. 아마 초고속 현미경으로 내 모습을 24시간 내내 며칠간 관찰한다면 미세하게 변하는 나의 외관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의 저자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인간 몸의 세포는 매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데 7년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한다.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세포로 구성된 존재다. 그러나 새로운 나의 몸에 나의 정신은 옛것을 강요한다. 그게 너잖아!라고. 고대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강물의 변화도 변화지만, 나도 변한다. 방금 전의 내가 지금의 나인가?      


그렇다면 ‘너 자신이 되어라’는 어떤 의미일까? 니체가 말하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역설적으로 지금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인 듯하다. ‘지금 나의 행위, 나의 생각 등은 내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나의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나태함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나태하면 감당하기 싫어진다. ‘나 자신되기’는 많은 에너지를 나에게 요구한다. 게으름을 딛고, 다가올 두려움을 견딜 힘이 필요하다.    


“위대한 사상가가 인간을 경멸한다면 그는 그의 나태함을 경멸하는 것이다. 나태함 때문에 인간은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처럼 관심도 흥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교류할 필요도, 가르칠 가치도 없어 보인다.”-니체 <반시대적 고찰> 중        


타인과 차이나는 나의 고유성을 발견할 때 기쁨보다는 이거 뭐지? 당황하게 되고 깊이 밀어 넣어버리고 싶다. 좋은 가치로 칭송되는 것이라면 모르되 이곳의 시선에서 배척될만한 어떤 특성이거나 욕망일 때 특히 그렇다. 이제 겨우 중학생인 딸이 한복모델 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당황했다. 공부할 나이에, 이십 대도 아니고,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 할까, 아나운서, 비행기 승무원 등등 기라성 같은 미인들이 나오는 잔치에 중1년생이 망신당하려고 등등. ‘너 자신이 되려는’ 아이를 주저앉히고 너 자신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수없이 나열하며 가로막는 사람이 바로 엄마인 나 자신이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누가 뭐라는 것이 대수인가. 애가 저렇게 하고 싶다는 데. 평소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삭히는 아이잖아. 그런데 저렇게 하고 싶다고 하면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내 안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 공부해야 하는데 마음이 붕 떠서 엉뚱한 데 관심을 가지면 어쩌지? 또 다른  목소리가 나를 설득한다. 그렇다고 자기가 할 일 안 하는 애는 아니지. 물론 집에서 공부하지는 않지만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어린애가 어른들 잔치에 끼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가 될 걸. 뭐가 되려고 벌써부터 저 모양이지? 아니야 자신이 되려는 아이를 막을 수야 없지.           


‘자기가 되는 것’은 자기 힘의 느낌을 즐기려는 욕망일 것이다. 나의 몸의 느낌을 따라가는 삶. 그 삶을 살 때, 그 행위를 할 때 나보다 내 몸이 먼저 안다. 기쁨과 고통의 어마어마한 동시적인 에너지가 나를 휘감는 느낌. 내 몸은 언제나 자기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내 몸의 반응을 관찰해보면 된다. 내 몸이 달아오르고 뜨거워지는가? 나의 이성이 딴죽을 거는가? 우리 몸 세포의 나이는 40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40억 년을 살아온 내 몸의 세포는 이성보다 훨씬 똑똑하다. 내 몸이 그것을 원하면, 웬만하면 그것을 하면 된다. 그런데 세포들은 자기를 위험으로 내모는 것도 개의치 않을 수도 있다. 자기 파괴조차도 몸은 개의치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위험을 감수하는 정신을 그토록 큰 소리로 주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니체는 개체가 자신이 되려는 삶을 살 것을 우리에게 말하지만 무조건 몸을 따르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초인(위버멘쉬)이 등장한다. 자기를 극복한 자, 자기를 지배한 자가 되라고 한다.     


나는 니체가 ‘비도덕 주의’와 ‘맹목성의 기쁨’을 말하는듯한 대목에서 자주 길을 잃고 헤맸다. 니체는 우리에게 그냥 막살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다. 니체는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자기를 극복한 자, 자기를 지배하는 자, 다시 말해 40억 년을 산 세포의 수준에서 판단하는 자기 극복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유일한 기적’이기 때문이다. 이 삶은 다른 사람 시선 때문에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한 번뿐인 삶이다. 텔레비전을 켜면 유명 인사들이 자주 하는 ‘인간은 유일한 기적’이라는 말, 이젠 자기 계발 담론쯤으로 자리매김한 말이지만 이 말을 들으면, 나는 언제나 콧등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 생을 사는 우리 모두 기적이 아닌가? 이 기적을 내가 지배하며 살아야지 다른 사람 비교하며 살아서야 되겠는가?        


니체는 “예술가들은 인간은 모두 유일한 기적이라고,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라고 알려 주려 한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유일무이 성의 엄격한 결과로써 아름답고 주목받을 만하며 모든 자연의 작품처럼 새롭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존재”라고. 그러나 인간이 “의견과 공포의 사슬에 묶여 있는 한” 이 유일한 기적, 이 행복한 복음을 알 수 없다. “자신의 창조력을 회피하고는 왼쪽 오른쪽으로, 앞뒤로, 온 사방을 힐끔거리는 인간보다 더 황폐하고 더 역겨운 피조물은 이 자연 속에는 없을 것”이라고 니체는 단언한다.    


 “그런 인간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그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고 썩어가고 짓이겨지고 팽팽히 부풀어 오른 옷이며 공포는커녕 동정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주렁주렁 달고 치장한 귀신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기이한 우리의 실존이 자기 고유의 척도와 법칙에 따라 살라고 우리에게 힘찬 용기를 북돋아 준다.”

                                                                                   -니체 <반시대적 고찰> 중       


“꺅! 엄마!  여기 와 봐! 내 이름! 여기 내 이름 있어! 꺅! 아악! 나 힐튼호텔 간다!” 

딸아이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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