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에 깃들어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당신에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이 있는가? 용서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통제 안 되는 감정으로 흔들린 적이 있는가? 밑도 끝도 없이 열기가 느껴지는가?
공자는 나이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나는 지천명은 고사하고, 사소한 일상에서조차 화가 날 때가 있다. 이 감정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튀어 올라온다. 아주 미운 인간의 얼굴이 떠오른다. 물론 젊은 시절에 비하면 살만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짐승과 위버멘쉬 (overman, ‘초인’)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틀림없다. 사람은 생애 동안, 아니 하루에도 여러 번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무너져 내린 바닥, 끝을 알 수 없는 텅 빈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 위를 곡예하는 자. 짐승과 위버멘쉬를 잇는 긴 줄 위에서 헤매는 존재. 되돌아가기도, 곧장 직진하기도 힘들다. 짐승에게로 하강하다가, 어느 순간, 위버멘쉬를 향해 나를 초월하여 나에게로 간다. 위버멘쉬를 향해 상승하는 자, 자기를 극복하는 자. 그러나 극복의 순간 하강하는 존재. 상승과 하강의 곡예로 지쳐 몰락하는 자. 몰락이 상승을 품고 있다.
감정조절도 잘 되고, 마음의 일렁임이 얼굴에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나를 지배하는 자가 되고 싶다. 그러나 느닷없이 휘몰아오는 정동. 그것은 짐승의 것일까? 자기를 극복하지 못한 자의 슬픔. 우리의 일상은 사실 우리의 무의식의 측면의 현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을 제어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순간 밖으로 나와 있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한.
니체는 좀 다른 말을 한다.
당신이 고통스럽다면, 당신이 삶에 피로와 불쾌감을 느낀다면 이 삶에 자꾸 한숨이 새어 나온다면 그것은 당신의 ‘영혼 탓이 아니고 배 탓’이라고. 생리적인 장애 때문이라고.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심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해석해서, 그런 심리상태에 죄를 뒤집어씌우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것은 지금까지 2000년 이상 서양인의 삶의 모든 부문을 틀어쥐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적 도덕’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들은 인간이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며 인간이 괴로운 것의 책임은 오로지 인간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고 설명한다고 니체는 이해한다.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교의 사랑 안에서 구원받고 영생하는 천국의 삶을, 괴로움과 고통의 치료제, 마취제로 제시한다.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고통 자체에 대한 마취 효과만 있을 뿐 근본적인 원인 치료가 못된다. 오히려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정신적 측면보다는 그의 배, 즉 생리적인 문제에 기인한다고.
현대의학의 측면으로 보자면 당신이 우울하다면 그것은 당신의 코티졸 호르몬 수치가 높고 세로토닌이 모자란 탓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신의 뇌의 문제, 당신 신체의 문제이다. 그래서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 약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삶에 의욕이 생긴다고 한다. 불안이나 우울이나 슬픔이나 고통의 감정은 생각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몸의 문제라고. 니체의 이런 해석 방식은 현대 뇌과학에서도 정설로 인정되는 추세다. 인간의 마음은 뇌의 작동방식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 말이다. 심리적 문제도 뇌를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불쾌한 것은 그 누군가에게 틀림없이 책임이 있다.”-이러한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은 모든 병자들의 특징이며, 실상 그들이 느끼는 불쾌함의 참된 원인, 즉 생리학적인 원인은 더욱 그들에게 감추어진 채 있다.(-이 원인은 교감신경의 병에 있거나, 담즙의 지나친 분비나, 혈액 중의 유황산 칼리나 인산칼리의 결핍이나,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하복부의 압박 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난소나 그와 같은 기관의 퇴화에 있을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자는 모두 고통스러운 감정에 대한 구실을 꾸미는데 놀라울 정도로 열중하며 독창적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중
즉 생리적 문제를 전적으로 정신의 문제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종종 궁금하다. 내가 슬픈 것은 나의 정신이 아니고 나의 몸의 문제라고? 그럴 리가! 나는 성장기 동안 슬픔의 감정 속에 갇혀서 살았다. 슬픔의 무지개들이 찬란한 무늬를 그리던 시절의 그림들, 그것은 꿈이었을까? 그것은 그러니까 정신만의 문제가 아니고 정신이 몸에 새긴 문제이고, 몸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문제이고 정신과 육체는 상호 작용을 하는 문제렷다! 그렇다. 정신과 신체의 작용으로 인한 문제다. 결국 육체성과 정신성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상호작용하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 고통”자체도 나에게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 지금까지 정확히 형식화할 수 없었던 사실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인과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 이는 아직은 완전히 불확정 상태이며 과학적으로 연관 지을 수 없는 어떤 것, (...) 누구든지 ‘정신적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거칠게 말해서, 그것은 그의 ‘영혼’의 탓이 아니라, 아마 아직은 그의 배[腹部] 탓일 것이다. 강인하고 잘난 인간은 딱딱한 음식물을 삼켜야만 했을 때라도 음식물을 소화시키듯이, 자신의 체험들을(행위나 비행들을 포함하여) 소화시킨다. 만일 그가 이러한 체험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종류의 소화불량은 저 음식물의 소화불량과 마찬가지로 생리적인 것이며, -오히려 사실은 저 음식물의 소화불량에 따른 한 결과일 뿐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중
몸이 건강하면 정신도 건강해진다. 그러니까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접근하는 해석 방식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의 문제가 생길 때, 심리적으로만 접근하거나, 그것을 죄의 문제로 보고 구원과 기도와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고 내 몸에, 즉 나의 코티졸 수치를 점검해보는 것도 괜찮은 접근법일 수 있겠다. 그래서 뇌과학 관련 대중서적들에 보면 우울증을 완화하기 위해, 즉 정신의 건강을 위해, 꾸준히 운동하기, 밥 잘 먹기, 마음의 휴식 등을 제안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미운가? 사는 게 재미가 없는가? 만사에 짜증이 나는가? 퇴근 시간만 기다려지는가? 세상이 왜 이 모양일까, 싶은가? 어떤 인간을 상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가?
그렇다면 잘 차려진 밥상 앞에 앉으시라. 맛있는 식사를 하시라. 나를 위한 밥상을. 당기는 음식을 찾아 드시라. 운동하시라. 운동은 마음건강과 신체건강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한동안 나를 내버려두는 시간, 나를 방치하면서 쉬는 시간을 가지시라.
나는 요즘 입맛이 없다. 인간에게 먹는 낙이 얼마나 큰데 밥맛이 없으니 사는 일이 재미가 없다. 위를 채우기 위해 대충 음식물을 구겨 넣고 커피로 마무리한다. 그러지 말 일이다. 오늘 나는 나를 위해, 함께 밥을 먹을 편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와 함께 푸른 잎사귀들이 많이 보이는 공기가 맑은 곳에 가서 맛있는 밥을 먹었다.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푸른 이파리 하나가 나에게 손을 흔들며 웃는다. 새 하얀 치아가 이쁘다! 처음으로 나무에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