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알려져 있다시피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는 연인 관계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특수성을 나타내 준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향연>(숲, 천병희)에는 이들의 ‘연애담’이 잘 기록돼 있다.
아름다운 청년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계략을 쓴다. 단둘이서 대화도 나누고, 레슬링 같은 운동도 하고, 만찬에 초대도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 밤을 보내기 위해 음모를 꾸민 후 소크라테스를 껴안고 밤새 누워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매력을 조롱하고 모욕했다고 흥분한다. 소크라테스와 자고 일어났을 때 아버지나 형과 잤을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문득 황진이가 서화담을 유혹하던 수법이 떠오른다.
예전에 <향연>을 읽었을 때 나는 들떴다. 그러한 정동의 근원은 낯선 곳에 초대되어 ‘오래된 새로움’을 추체험한 자의 흥분쯤으로 정리될 듯하다. 내 안에 없는 매우 이질적인 감정의 생성. 생성하는 감정 다발들의 춤사위가 부유한다. 이번에 두 번째 읽은 느낌 역시 비슷하다. 책은 일상의 인간을 고조시킨다.
무엇보다 이 책의 뒷부분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해서 소크라테스에게 술주정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미소년 알키비아데스가 귀엽다. 알키비아데스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숲, 천병희)에서 배신자로 나온다.
알키비아데스가 주도한 시라쿠사이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하자, 알키비아데스는 재빨리 적진인 스파르타 측으로 가서 조국 아테네의 상황을 밀고한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거기서 다시 버림받자 페르시아 쪽으로 망명해서 페르시아를 위해 일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실존의 인물이다. 그때 나에게 알키비아데스는 그 흔한 배신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알키비아데스가 이 알키비아데스다! 그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 젊은 시절 이처럼 지혜를 사랑하고, 소크라테스를 따라다니며 사랑받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해서 어떤 사람에 대해 호불호를 말할 때 그것은 자기 경험 내에서의 판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연인의 사랑을 받고 싶은 간절함이 2500년을 뛰어넘어 내게로 전해진다. 바람을 타고 왔는가? 물론 이 글 <향연>은 플라톤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크라테스이며 알키비아데스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자주 글 속에 물든다. 어떤 불가해한 파토스에 전염되는 행복감. 분석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는 맹목의 그 힘들 안에 오랫동안 들어가 있고 싶은 태초의 정념. 그곳에 흐르는 ‘힘들’의 파동에 내가 감염된 때문일까? 알키비아데스의 소크라테스를 향한 마음은 무조건 무죄다! 이국적이며 이상한 아름다움의 마력 같은.
이 책 향연에서 에로스는 ‘사랑받는 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라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디오티마는 말한다. 사랑하는 이는 자기의 결여를 채우기를 원한다. 알키비아데스는 말하자면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지혜에 대한 사랑을 소크라테스에게서 얻으려고 그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가 실제로 바라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즉 알키비아데스는 좋은 것을 사랑함으로써 좋은 것이 자기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에로스의 성질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유혹을 거부한다. 소크라테스가 틀린 것일까?
<향연>은 비극작가 아가톤의 경연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아가톤의 집에서 잔치를 하면서,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모인 사람들이 에로스(사랑)에 대해 말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먼저 파이드로스는 “에로스는 인간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푼다.”라고 말한다. 소년에게는 어려서부터 자기를 사랑해줄 고결한 연인을 갖는 것보다, 연인에게는 고결한 연동(소년)을 갖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고. 또 에로스 자신이 용기를 불어주어 타고난 영웅인양 연인과 연동을 용감무쌍하게 만들어 준다고 한다. 파이드로스는 “에로스는 신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존경스러우며, 인간들이 생전에나 사후에 미덕과 행복을 얻는데 가장 도움이 된다.”라고 말한다.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는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 둘이라고 말하며 천상의 에로스에 가치를 부여한다. 재미있는 것은 천상의 에로스는 동성애, 즉 소년과의 사랑을 말하며, 범속의 에로스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을 일컫는다는 점이다. 즉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평가절하 된다.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는 인간의 혼뿐 아니라 우주만물에 속하는 광범위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는 어떤 것들에 대한 사랑’이고 어떤 것들이란 그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는 필멸과 불멸의 중간에 있는 위대한 정령(다이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 몸에 집착하는 것은 경멸스럽고 보잘것없는 일이니 집착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단계는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디오티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의 신비를 향해 올바르게 나아가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을 계단으로 이용하면서, 아름다움을 위해 꾸준히 올라가되 한 아름다운 몸에서 두 아름다운 몸으로, 두 아름다운 몸에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아름다운 몸들에서 아름다운 활동들로, 아름다운 활동들에서 아름다운 지식들로, 끝으로 아름다운 지식들에서 아름다운 것 자체만을 대상으로 하는 저 특별한 지식으로 나감으로써, 드디어 아름다운 것 자체가 무엇인가 알게 되는 것이라오”
이어 디오티마는 “인간에게 살만한 곳이 있다면 아름다운 것 자체를 관조하는 이러한 경지야말로 살 만한 곳”이라고 말한다.
한창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한다. 술 취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면서 소크라테스를 탓한다.(실은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재미있는 일화들이 소개된다.
플라톤은 이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서 소위 플라토닉 러브의 핵심에 도달한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하는 방식은 플라토닉 러브의 전형이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전쟁에 나가서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알키비아데스가 상을 타도록 도와준다. 또 알키비아데스가 초대하는 만찬에도 나가고, 운동을 하자면 운동을 하고, 계략을 써서 함께 잠잘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함께 잔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방식으로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해 준다. 어떤 사람이 나와 대화하고, 나의 초대에 응해주고, 함께 머물러준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 대한 애정을 전제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행위 자체가 그리스 사회에서는 교육이었다. 연인이 연동에게 해줄 수 있는 교육. 싫은 연동(소년)과의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소크라테스는 그의 몸을 갖지는 않는다. 그 시대에는 남성 간의 성관계가 아름다운 행위로 인정받는 사회였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절제이며, 용기가 아닐까?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한 인내가 필요한 행위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의 몸을 갖지 않도록 설정한 것은, 동성애의 거부도 아니고,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더구나 성 불구 같은 가설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소크라테스의 인격의 고결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일 것이며, 플라톤의 사랑법인 플라토닉 러브를 가장 잘 구현하는 사랑의 방식일 뿐이다. 사랑의 사다리를 올라오면 이제 아름다운 것 자체만을 보고 아름다움 자체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런 경지에 올라온 인물로, 굳이 아름다운 몸을 취하지 않고도, 연동들에게 자신이 ‘임신한’ 정신적인 지식을 나누는 자가 된 것이다.
<향연>이 존재 자체로 지금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은, ‘사랑’(에로스)에 대한 현대인의 상식이 ‘비상식’이었던 시대가 존재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는 규범이나 관습이나 삶의 내용들도 언제든지 정반대의 지점에 놓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2500년 전에는 에로스가 동성 간의 몸에 대한 사랑을 기본 전제로 해서 출발했다는 점,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여담이지만 가치 전도된 그런 기묘한 문화적 지반으로부터 니체라는 도발적인 철학자는 탄생했는지 모른다. 생식의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도 한참 거스르는(?) 그리스 문화에 비하면 니체 철학의 ‘도발적인’ 면모는 순박하다. 이런 고대 문화의 유산이 니체라는 ‘이단아’를 탄생시킨 토양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도덕을 “방임과는 반대의 것이며 ‘자연’에 대한 폭압이고 ‘이성’에 대해서도 폭압”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도덕은 풍습의 도덕이며, 풍습에 대한 복종으로, 풍습(관습)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공동체의 어떤 명령 정도로 이해하는 듯하다. 이 풍습의 도덕은 종족 보존의 필요에 따라, 또는 초기에는 악이었던 것이 도덕이라는 옷을 입은 부도덕한 기원을 갖는다고 본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그리스의 동성애의 풍습은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전통 관습과 시대적 필요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라고. 나의 가설은 이렇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노예와 여성을 제외한 남성만이 인간이었던 그 시대에는 교육제도란 것이 따로 없다. 교육은 소년 남성이 성인 남성에게 받는 것이다. 성인 남성은 젊은 청소년을 거저 교육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젊은이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가르침은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연인과 연동(孌童) 관계를 맺고, 스승이 요구하면 잠자리를 함께하고 몸을 주면서 사랑의 정점을 경험한다. 그리고 스승의 지식과, 삶에 요구되는 일상적인 교육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에로스)은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에서 아름다운 지식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나간다. 플라톤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에서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즉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로 논지를 확장해 간 것이 아닐까?
니체는 이런 그리스 문화를 남성의 문화라고 본다.
“소년에 대한 남성들의 연애 관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남성 교육에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전제였다. (...) 그리스적 본성이 지닌 힘의 모든 이상주의는 그 연애 관계에 몰두했다. 그리고 기원 5-6세기에서만큼 젊은이들이 그렇게 주의 깊고 친절하게 단지 그들의 그 최고의 것(남성다움)의 관점에서 논의된 적은 아마 결코 없었을 것이다. (...) 이 관계가 높이 해석되면 될수록 여성과의 교제는 어린아이의 출산과 관능적 쾌락이라는 관점에서 그만큼 더 낮게 보여졌다. -여성과의 교제에서는 어린아이의 출산과 쾌락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고려되지 않았다. 정신적인 교제는 없었고, 진정한 연애조차 없었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그리스 문화는 남성의 문화이기에 여성이 설 자리가 없다. 여성이 사랑의 주체로 등장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은 출산의 관점에서만 고려됐으며 이 사회에서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남성은 없다. 여성과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고 종족보존과 쾌락을 의미한다. 즉 ‘고귀한’ 사랑은 남성끼리만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남성의 몸을 갖는 사랑이 결국 플라토닉 러브로 향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 이곳의 상식에 너무 단단히 착근해 있다고 느껴지는 어느 시점에, 나는 향연을 다시 읽을 것이다. 재미있다.
(...)
내가 좋아하는 것은, 산과 바다의 동물들처럼
나를 잠시나마 잊고,
아름다운 옆길로 빠져 생각에 잠기는 것,
이윽고 나를 먼 곳에서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
나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로 유혹하는 것.
-니체 <즐거운 학문 33> <고독한 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