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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경 Jan 12. 2019

자기를 비웃을 수 있는 자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모든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비극작가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예술을 자신의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을 때, -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비웃을 수 있을 때,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위대함의 마지막 절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자기 작품에 도취된 예술가란 얼마나 꼴불견인가? 창작자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관람자는 얼마나 순진한가? 니체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자신의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을 때’ 위대함의 절정에 이른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까지 비웃을 수 있을 때 위대함의 절정에 이른다고. 이런 말을 하는 맥락은 쇼펜하우어의 영향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의 구현자가 되어버린 바그너를, 그의 악극 파르지팔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자기 작품을 비웃을 수 있는 예술가, 자기를 비웃을 수 있는 비극작가, 자기를 비웃을 수 있는 인간,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리 두기의 여부가 될 것이다. 예술가는 끊임없이 작품과 자기 사이의 긴장과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래야 자기 작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거리 두기의 파토스’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예술가는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 향하는 의지를 지녀야 한다. 이런 예술가 라야 위대함의 여부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국에 가서는 자기 작품을 자신의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을 때, 또한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 있을 때 그는 자유로워진다. 자기 작품은 물론 자기조차 비웃을 수 있는 예술가. 이것은 작품과 예술가 자신, 그리고 예술가 자신과 그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이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비웃을 수 있다. 내 자식과 부모인 내가 분리되지 않고 밀착되어 있을 때 나는 자식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과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 제대로 나를 볼 수 없다. 나와 내가 거리를 두고 있을 때 나는 움직일 수 있다. 자유로워진다. 나를 비웃을 수 있다. 대상으로서의 나를 잘  볼 수 있다. 거리 유지하기, 니체 식으로 말하면 ‘거리의 파토스.’    


 아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분은 지난 수 십 년간 담배를 피워왔다. 담배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으름장도, 담뱃갑의 무시무시한 경고문구도, 의사와 주위 사람들이 협박성 충고도 다 소용이 없었다. 이 좋은 걸 왜 포기하고 사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장면을 보게 된다. 골목길에서 구부정한 중년의 남성이 몸을 움츠린 채 급히 답배를 피우는 모습. 추레하고 서글픈 실루엣. 그 순간 ‘저게 내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날 이후 바로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나에게서 떠나 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본 나의 모습, 나를 객관화시켜 바라본 나. 이 분은 ‘자기를 비웃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기와 결별한다. 예술가뿐이 아니다. 인간은 거리를 두고 자기를 바라볼 때 자기를 보고 웃을 수 있다. 심각하고 진지해지지 않고 자유롭게 된다. 이 거리만큼 자유를 얻는다.    


자기를 비웃는다는 것은 왜곡된 자기상을 만들어 자기를 학대하는 마조히즘적인 심리와는 다른 계열에 속한다. 건강한 자기 보기의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능력이라 해야 할까? 건강한 자의 웃음이라 해야 할까? 유년기의 상처와 병적 경험으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심리적 현상과 어찌 보면 반대 지점에 자기를 비웃을 줄 아는 자의 건강함이 있다.     


인간은 생애주기 동안 크고 작은 상처를 경험한다. 특히 우리가 매우 무력한 어린아이였을 때 받은 심각한 상처와 충격은 평생 영향을 미친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인간, 열등한 인간이라는 자기를 향한 학대와 폭력의 감정의 가장 큰 줄기는 부모 혹은 주 양육자에게서 비롯된다. 자기 효능감과 자존감의 상실. 이런 슬픈 역사를 가진 사람의 상처의 감정이 그에게 질곡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서 자기 유능감을 회복하고, 자기에 대한 존중감을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왜곡되게 형성된 자화상을 수정하고, 자신의 유일성을 깨닫는 것,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 이것이 소위 말하는 힐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으나 우리들은 누구나 힐링이 필요하다. 이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존중받을 만한 사람이며,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일어설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 치유에서는 근거 없는 자기 비하나 왜곡된 자아상을 점검하고 해체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좋아하기. 즉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여태껏 터무니없이 자기를 비웃고, 자기를 몰아치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자기를 들들 볶아왔다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힐링산업이 오랫동안 몸값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질이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 길지 않은 생애를 살면서 인간은 상처 입고 고통받지만, 누구나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고, 자신의 유능감을 느끼고 싶다. 누구나 모르고는 그럴 수 있으나, 알고는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자기 자신을 비웃고 모욕하며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니체는 ‘자기를 비웃을 수 있는 자’만이 위대함의 마지막 절정에 이른다는 뚱딴지같은 말을 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나보고 나를 비웃으라니! 그렇잖아도 내가 마땅찮고, 나의 능력, 삶의 방식, 성격, 나의 머리스타일, 나의 생김새, 나의 밥 먹는 모습,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 의심스러운데, 나를 비웃으라니! 이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나를 다독여 힘든 세상을 잘 버티며 주어진 몫의 삶을 살아내는 것도 힘든 판에 나를 비웃으라니.          


원래 ‘거리의 파토스’는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을 나누면서 주인이 갖는 자기 정체성, 다시 말해 타자와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거리의 파토스는 주인 종족이 노예 종족과 정신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 개념이다.     


“좋음이라는 판단은 (...)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즉 저급한 모든 사람, 저급한 뜻을 지니고 있는 사람, 비속한 사람, 천민적인 사람들에 대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다고, 즉 제일급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사람, 강한 사람, 드높은 사람들, 높은 뜻을 지닌 사람들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에서 가치를 창조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비로소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도덕의 계보> 중    


여기서  ‘거리의 파토스는’ 좋은 인간들인 주인 종족이 저급한 하층계급의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함, 즉 그들과 차별화되는 어떤 감정일 것이다. 정신적 거리감의 감정, 노예 도덕의 ‘저급한’ 집단과 거리를 두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자’란 자기 자신과 ‘거리의 파토스’를 가질 줄 아는 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과 거리의 파토스를 유지할 줄 아는 자는 자기를 비웃을 수 있는 자다. 이때 비웃음이란 자기를 왜곡하고, 학대하는 비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니체는 자기를 비웃을 수 있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를 도취 속에서, 허황된 과장 속에서, 망상 속에서 보는 자를 위대한 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냉정하게, 자기를 보고, 객관적으로 자기를 자기밖에 세워놓을 수 있는 자, 그때 그 자기를 보고 비웃을 수 있는 자는 위대함의 마지막 절정에 이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뒤틀리고 심리적으로 병든 인간, 치료가 필요한 인간이 아닌 건강한 인간이 자기를 자기 밖으로 불러내서 바라보고,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은, 니체의 말대로 ‘마지막 위대함에 이르는 절정’의 단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니체의 주인 도덕의 주인 종족, 즉 강자는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준거가 되어 가치를 창조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이 강자는 무의식적인 원한 감정이 없고 자기를 왜곡하지 않는다. 또한 양심의 가책이 없고, 과대망상도 피해망상도 없다. 건강한 강자만이 자기를 비웃을 수 있다. 이때 이 비웃음은 어떤 도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거리두기는 어쩌면 고통과 직면하기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나는 거리두기를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인간의 특징일 것이다. 건강한 인간은 거리두기를, 그 긴장을, 그 분열을 견뎌낸다. 자기를 비웃는 그 고통을 마주한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사유이며, 불편하게 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마지막 위대함의 절정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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