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하는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는다. 보통의 상황에서라면 여자들 삐짐은 일주일 이상을 가는데 어떤 언급도 없다.
할 말이 분명 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이 더욱 강한 느낌을 남긴다.
그녀는 한술 더 떠 농담을 던진다.
(카톡) 사시 까이아? 그까이꺼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한번 웃게 만든다.
오늘은 슈퍼투스칸의 오리지날 시조새 사시까이아 이다.
여러차례 품절이 되어 가격대는
삼십만 원을 훌쩍 넘었다. 투스카나의 DOC 등급을 포기하고 보르도 까쇼 블렌딩으로 상품을 출시했다. 남들이 인정하는 기준에 맞추지않고 철저히 자신의 기호에 따랐다. 결국 그 자존심은 국가 등급체계까지 바뀌게 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가 '볼게리 사시끼이야 DOC'가 되는 최초의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예약하기 어렵기로 명성이 자자한 한남동 오르조 오스테리아로 향한다. 작은 공간이지만 벌써부터 인스타들로 북적거린다. 그녀를 기다리며 메뉴를 정독하다가 고개를 드는데 그녀가 또각또각 다가온다. 일순간 주변은 암흑으로 방전되고 그녀만이 햇살처럼 반짝이는 후광을 등에 입고서 등장한다. 나의 여주는 역시 그녀이다. 아니 주님이시다. 나는 주기도문의 문장을 읊조린다. 주여.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모든 영광이 하늘에서 이뤄진것처럼 땅에서 이뤄지게 하소서.
이렇게 하는 거 맞나? A맨 ~
앉자마자 단 번에 메뉴판을 보더니
엣지있는 성격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화이트라구 파스타와 스파이시 리조토, 카프레제를 연달아 주문한다.
이어지는 사시끼이야 오픈. 수 천병을 따본 뿅따실력으로 가뿐히 코르크를 올리고 코를 박아본다.
벌써부터 묵직한 삼나무향과 가죽향이 올라온다.
한 모금을 입에서 굴리니 이녀석은 진짜 상남자,
결이 두껍고 거칠다. 보르도 스타일의 깊은 타닌이 힘있게 조인다
와인으로 모든 게 용서가 된 걸까? 그녀의 두눈에는 하나의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 떨어질 것 같은 유리알 눈동자가 선명히 나를 바라본다. 눈에서는 이랑이 일듯 촉촉히 물기가 차오르며 찰랑인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이 깊이 차오르는 뭉클함, 와인이 주는 무게깊은 웅장함.
언젠가 말한 그녀의 어록이 떠오른다.
인생은 예술처럼 아트하게 와인은 사랑처럼 하트하게
벽면에 걸린 로스코의 붉은 색면 추상화 마저 모든 게 완벽한 페어링이었다. 하나도 색깔을 잃지 않고 각자의 개성이 만들어내는 쿼르텟.
나는 과연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일까? 그녀의 머리가 나의 오른쪽 어깨에 실린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스스로 속삭였다. ' 내게 더 기대도 괜찮아. 오퍼스원이든 뭐든 너를 위해 다해줄 수 있어 ' 13.5도의 와인과 36.5도의 체온이 합쳐진다. 꿈결처럼 달콤하고 숨결처럼 감미롭다. Sweet like a dream, my sweetheart.
시간은 벌써 12시를 지난 미드나잇. 밖에는 어느새 소나기가 내렸는지 물기젖은 거리에서 비냄새가 난다. 한남동 오거리의 차도는 헤드라이트로 붉게 얼룩져있다. 십차선의 건널목을 옆구리를 밀착하고 발맞춰 나란히 가로지른다. 백미터 코앞에는 7080라이브가 있다.
취기로 급발진한 나는 거침없이 마이크를 부여잡고 그녀를 향한 세레나데를 부른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여전히 난 부족하지만 받아주겠냐고. 나에겐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내삶의 전부라 어쩔수 없다고 말야.
이어서 책받침 미녀 피비케이츠를 똑닮은 그녀가 답가를 부른다.
When I am with you, Its paradise. No place on earth could be so nice. As I gaze in to your eyes, I realize its paradise. 술을 마실 때마다 말했던 '나는 너가 좋아'라고 고백했던 건조한 문장에 하나의 수식어가 추가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가 더 좋아져'
A fine wine is better with age. And I am better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