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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균형 Sep 02. 2022

공백의 시간

feat. 제주 한달살이


   여행할 때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날씨가 생각과 다를 때도 있고, 일정이 틀어질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때도 있고. 그 상황이 닥친 순간에는 속이 상하지만, 돌이켜보면 변수로 인해 벌어진 틈 사이를 비집고 찾아온 생소한 순간들이 여행을 더 여행답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지난 여행을 돌이켜보면 관광지에 계획대로 갔던 곳 보다 예상치 않은 순간들이 더 펄떡이는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던데.


   스무 살 여름, 생애 첫 배낭여행지는 베트남이었다. 친구와 함께 보트 투어를 가기로 했는데, 세상에 둘 다 깜빡 늦잠을 잔 거다. 맙소사. 하루의 일정이 어그러졌기에 둘 다 땅이 무너진 듯 속상해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필요 없는 하루가 온전한 쉼의 여행을 맛보게 해 주었다. 하릴없이 길을 걷다가 열대지방의 짧고 굵은 거친 비를 맞이했다. 어디를 갈 생각도 없이 가까운 건물 처마 밑에서 한 시간을 쪼그려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결혼하던 해 여름, 예랑 님과 제주도에 갔다. 함께 떠나는 첫 여행이었다. 목적은 신랑의 스쿠버다이빙 자격증 취득.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등 떠밀어 떠나온 여행이었다. 무사히 자격증을 따던 날, 오전에 다이빙을 함께 즐긴 후 숙소에 돌아와 누구 하나 말릴 새도 없이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여행에 와서 낮잠을 잔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 없다. 잠에서 깨었을 때 살짝 당황했다. 내가 잠이 들었다고? 밖은 이미 어둑해지는 중이었다. 슬리퍼를 끌고 나와 저녁을 먹는데, 몸이 너무 상쾌한 거다. 이것도 나쁘지 않군? 꼭 여행에서 무엇을 꽉꽉 채우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온전히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신기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제주에 있다. 한달살이를 하는 중이다. 익숙한 장소를 떠나왔기에 여행인 듯 하지만, 한 돌, 두 돌을 갓 지난 아이들의 컨디션을 살피며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는 아직 관광지에 가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관광지 대신 매일같이 두어 번 동네 산책하는 일을 쉬지 않고 있다. 근처 놀이터로 한번, 근처 바닷가로 한번. 가는 길에 보이는 말, 나비, 제비, 멍멍이, 고양이와는 꼭 인사를 하고 지나가야 한다. 그저 길가에 지나가는 참새를 쫓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깡총깡총 즐거워한다. 별로 다르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낯선 동네에서의 산책만으로도 여행이 되는 곳에 서 있다.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가면 좋다는 에코랜드라는 곳에 가 보았다. 에코랜드는 테마파크로 1800년대 증기기관차로 돌아다니면서 곶자왈 원시림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30분마다 한 대씩 지나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에 J가 내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 조금 더 재우기로 했다. 기차를 한대, 두대 보내며 작은 기차역 벤치에 앉아 아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렸다.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가야 할 곳도 없으니 그저 그 순간의 감정과 상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아이를 안고 가만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고 가는 기차를 지키는 역무원 아저씨, 삼삼오오 와서 잠시 앉았다 떠나는 가족들, 역에 내리지 않고 경치를 바라보는 사람들, 더운데도 뛰어다니는 아이들, 아이들의 안위를 끊임없이 살피는 부모들, 등등. 더운 여름날 아이와 나의 온기가 서로 더해져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서인지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간간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 여름날의 바람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사실, 거창하게 제주 한달살이라고 떠나왔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랄까. J와 B는 오자마자 열이 오르더니, 어디서 옮았는지 수족구에 걸려 격리 아닌 격리생활을 했다. 아이가 친구들과 재밌게 놀라고 친구도 초대했는데 J의 수족구로 제주 상봉 하루 만에 격리되어 각자의 시간을 보내었고, 4주 차에 방문하기로 한 놀이터 친구는 엄마의 때 이른 복직으로 일정이 취소되었다. 아이가 친구들과 제주에서 깔깔대며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아마 아이보다 내가 더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가족끼리 지지고 볶으라는 하늘의 뜻인가.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것도 좋았다. 생각해보면 아이들과 온전히 하루, 일주일, 한 달을 이렇게 함께 있어본 적이 없다. 차분하게(?) 지내는 제주에서의 이 나날들이 여러모로 우리 가족 모두에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왔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일상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곱게 잘 포개 놓은 조약돌 하나 걷어냄으로 인해 생기는 틈. 그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맑은 물 한 줄기를 가만히 보는 중이다. 지금 떠나 온 제주 한달살이, 계획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공백의 시간이, 복직 전 나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인 것만 같다. 산책 가고 싶을 때 산책 가고, 바다에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정해진 루틴 없이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중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여행을 떠나왔는지 육아를 하러 왔는지 헷갈리지만, 그래도 이렇게 온전히 아이들과 살 맞대고 낄낄거릴 수 있는 시간이 감사하다. 항상 켜켜이 쌓여있는 할 일들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주어진 것, 그 틈 사이에서 느끼는 온전함은 내가 있던 곳을 떠나왔기에 비로소 향유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멈추어 바람 한 줌 느낄 수 있는 여백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한달살이의 전부일지도.


   여행은 떠나기 전까지가 좋다고 하더라. 시작된 순간부터는 끝날 날이 다가오는 것에 초조함이 느껴진다나 뭐라나. 지금 나의 심정이 딱 그러하다. 이렇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마냥 아쉽고, 할 수만 있다면 움켜잡고 싶다. 지나고 나면 언제 또 이렇게 훌쩍 떠나올 수 있을까 싶고, 일상의 쳇바퀴에 갇혀 다시는 지금과 같은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일분일초가 아쉽고 아깝게 느껴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잘 보내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래, 아쉬워하지 않고 남은 시간을 더 만끽하다 돌아가자. seize the day. 지금에 충실하자, 그리고 사랑하자. 어제보다 더 많이, 하루하루 더 듬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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