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연필은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가장 소박하고도 소중한 물건이다. 길쭉한 나무 막대 안에 담긴 작은 흑연 심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아이였지만, 연필은 늘 내 손안에 있었다. 글씨를 배우던 첫 순간부터, 수없이 많은 실수를 고쳐 쓰던 시간까지, 연필은 늘 나와 함께였다.
연필을 처음 쥐었던 기억은 흐릿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느껴졌던 그 미세한 떨림은 여전히 생생하다. 아직 손에 익지 않았던 연필을 잡고 글씨를 따라 쓰던 어린 시절, 필기보다 더 집중했던 것은 연필 끝을 종이에 바르게 대는 일이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는 마치 춤을 추듯 공책 위를 돌아다녔고, 종종 실수를 할 때마다 연필 뒤에 달린 작은 지우개로 고쳐 쓰곤 했다.
가끔 연필이 둔해지면, 연필깎이가 아닌 칼로 연필을 깎던 기억도 난다. 어른들이 능숙하게 연필을 깎는 모습을 보며 나도 따라 해 보았지만, 손끝에 힘을 주지 못해 삐뚤어진 연필심을 만들곤 했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느껴지던 나무 냄새와 흑연이 손끝에 묻던 감촉은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연필을 깎아 다시 선명한 심을 만들어 내는 일은 나에게 작은 성취감을 주었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나에게 연필은 친구이자 위로였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칠판 글씨를 따라 쓰는 일이 나에게는 버거운 과제였다. 하지만 연필을 쥐고 있는 순간만큼은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글씨가 틀리고, 수학 문제의 답이 엉뚱하게 나왔더라도 연필은 내게 "다시 해봐"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연필 뒤에 달린 지우개로 잘못 쓴 글씨를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조금씩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연필심이 뭉툭해져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본능적으로 연필심을 침으로 적셨다. 어린 마음에 연필심에 침을 바르면 글씨가 더 잘 써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나름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습이 어리숙하고도 귀엽게 느껴진다.
연필은 단지 공부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상상력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했다. 공책 한 구석에 나만의 작은 세상을 그리기도 하고, 종이에 무의미한 선들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연필로 그린 그림과 낙서들은 그 시절의 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시험지를 마주할 때면 연필은 더욱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특히 시험지 맨 위에 이름을 쓸 때의 긴장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연필을 쥔 손이 떨릴 때면 이름조차 삐뚤게 적히곤 했지만, 그 작은 연필심이 답안지에 찍히는 순간만큼은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부는 여전히 서툴렀고, 성적표가 늘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연필은 내게 노력의 흔적을 남겨 주었다.
시간이 흘러 연필은 점점 내 일상에서 멀어졌다. 펜과 키보드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연필은 더 이상 필수적인 도구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서랍에서 오래된 연필을 발견할 때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낡고 짧아진 연필은 마치 내가 지나온 시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연필은 내가 얼마나 많이 실패하고 다시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작은 증거다.
연필은 늘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나를 가르쳤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 고쳐 나가면 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연필심이 부러지면 깎아내고, 잘못 쓴 글씨는 지우고 다시 쓰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다듬어가며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가끔 연필을 쥐고 글씨를 써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연필심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는 마치 나의 호흡과도 같아서,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지금도 나는 연필을 통해 나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단지 글씨나 그림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과 나의 노력이 새겨진 흔적이다.
연필은 나에게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나의 성장과 배움, 그리고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했던 의지를 담고 있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나를 위로해 주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어 준 연필. 나는 그 작은 도구를 통해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삶의 소중한 가치를 깨달았다.
이제 나는 연필을 잡는 손끝에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갈 것이다. 연필심처럼 때로는 부러지고, 깎아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 모든 과정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완성해 갈 것이다. 연필은 여전히 내게 속삭이고 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