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성경 해석은 서구 신학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그건 서구 사람들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해석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서구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양한 관점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성경의 의미가 더욱 풍성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중동의 문화적 배경에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중동의 문화 배경에서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40년 이상 살면서 중동의 문화와 언어에 익숙한 케네스 베일리 교수는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베이루트 근동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대 아람어 주석을 살펴보면서 중동 사람들이 성경을 어떻게 읽었을까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저는 그의 책을 근거로 해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 이야기를 각색해 보았습니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란 책은 688쪽으로 좀 두껍긴 하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평신도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구입하셔서 한 번 읽어보기를 강추합니다.
흔히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이야기를 할 때에는 주로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읽는 경향이 강합니다.
저는 반대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의 입장으로 한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1. 사연이 있는 여인
짐작건대 그녀는 사연이 있는 여인입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말은 현대인이 들으면 놀랄 이야기이긴 하지만, 2,000년 전 예수님 당시 중동의 의료체계는 형편없었습니다. 게다가 잦은 전쟁 때문에 남자들이 죽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2,3번 결혼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5번 결혼했다는 사실은 좀 많긴 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상당한 미모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보통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는데 그녀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우물물을 길어 갈 때는 무리를 지어서 갑니다. 시간은 정오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서 아침저녁으로 우물을 찾아갑니다. 그녀들은 우물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냅니다. 수가 성 여인은 그 무리에 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뒷말과 험담을 주로 했던 우물가 대화에서 늘 자신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걸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사람들이 싫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더 싫었습니다.
2. 낯선 남자 예수
그녀가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정오의 시간에 마을에서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세겜의 우물가를 찾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그녀의 운은 좋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우물가에 웬 낯선 남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오늘 정말 재수 없는 날이로구나” 속삭였습니다. 그래도 우물가로 다가가면서 기대했습니다. 남자가 최소한의 예의가 있으면 여자가 다가갈 때 사회적 거리 두기의 예를 따라 피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요지부동 우물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먼지 들어가지 말라고 우물을 덮어놓은 우물 덮개에 떡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건방지기 짝이 없었고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습니다. 대개 그런 남자들이 하는 수작이라곤 뻔합니다. 우물 물을 길러 오는 여자들을 꾀는 한량들이 대부분입니다.
3. 유대인 남자 예수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거만함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와 같이 여겼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사마리아와 유대는 적대감을 가지고 서로 원수시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인사도 나누지 않고, 함께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유대인은 사회적 거리 두기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을 걸어왔습니다.
“제게 물을 좀 주실래요?”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것도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처음에 이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보통 유대인과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500년 적대감을 뛰어넘어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거리감을 뛰어넘어 말을 걸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나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몰랐고, 당황하여 퉁명스럽게 대꾸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선교 신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중동인들은 물을 떠먹기 위하여 두레박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일행도 두레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두레박을 가지고 마을로 음식 구하러 갔습니다. 목이 마르셨던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레박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주님은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상대방의 도움이 필요한 낮은 자리에 서셨습니다.
“나는 지쳤고 도움이 필요하오!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소?”
스리랑카의 위대한 신학자 대니얼 나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아 땅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이 지닌 특징 중 하나는 많은 봉사 기관이다. 우리는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과 농장 등을 운영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런 기관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봉사하는 통로인 동시에, 세상에서 권력을 누리게 해주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기관 덕분에 후견인이 되고, 고용을 통제하고, 때로는 돈을 벌기도 한다. 그 결과 지역 사회의 다른 이들은 교회를 질시하는 눈으로, 때로는 두려움을 품고, 때로는 의심마저 품고 보게 된다.”
지금까지 기독교 선교는 섬기고 봉사한다고 하면서 높은 자리, 베푸는 자리에 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낮은 자리, 도움이 필요한 자리에 서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오로지 지팡이만 가져가고, 허리띠에는 빵과 주머니와 돈도 챙기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막6:8-9)고 하셨습니다. 낮은 자리, 도움이 필요한 자리에 서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문화에선 주는 자가 강자요, 받는 자가 약자입니다. 기독교 선교는 주는 자의 자부심과 받는 자의 굴욕감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4. 랍비 예수
그녀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성경에 정통한 랍비로 보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하나님의 선물은 틀림없이 모세의 율법 곧 토라를 뜻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 여자의 좁은 시각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백성에게 주는 언약, 열방의 빛으로 주리라”(사42:6)
여기서 열방의 빛으로 주는 언약은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를 말합니다. 그는 다름 아닌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과 “물 좀 달라 하는 이”를 연결하여 말했습니다. 다시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녀는 그가 하는 이야기에 왠지 모를 관심이 가면서도 도전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요4:10-11)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이 야곱을 자기 조상이라고 하면 발끈 화를 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자기들의 조상이지, 이방의 피가 섞여 있는 사마리아인들은 야곱의 이름을 들먹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두 번째 도전도 보기 좋게 실패하였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여인이 말하는 우물(φρέαρ)은 땅속 깊은 곳에 있어 물 긷는 수고를 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샘물(πηγή)은 솟아나오는 물이기에 물 긷는 수고가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말하는 샘물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5. 선지자 예수
일반적으로 선지자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두려움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과 민족의 잘못을 거침없이 말합니다. 선지자는 두려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4:17-18)
핵심을 찔린 그녀는 놀라 말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녀는 자신과 대화하는 분이 보통 분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마음속과 사정을 꿰뚫어 보는 주님 앞에서 여자는 마지막으로 도전합니다. 그녀는 사마리아인들이 신성시하는 그리심산과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을 비교하면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적 힘의 상징은 어떤 지역에 세워진 성전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그리심산에 세워진 성전이고,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특정 장소의 예배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장소뿐만 아니라 민족적 차별과 남녀 차별 문제도 뛰어넘습니다. 참된 예배는 모든 율법적 / 사회적 / 종교적 / 지역적 / 인종적 / 남녀 차별의 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율법의 눈으로 보면 남편 다섯인 여자와 대화하는 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모든 편견을 뛰어넘어 그녀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대화하였습니다. 그때 그녀의 유명한 문답이 오고 갑니다.
6. 메시아 예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4:25)
이러한 여자의 질문을 끌어내기 위하여 예수님은 지금까지 대화하셨습니다.
“내가 그라”
여기 헬라어는 ego-eimi(ἐγώ εἰμι)로서 구약식으로 표현하면 야웨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야웨”(יהוה, I am who I am)라고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그 순간 “하나님의 실존”앞에 엄청난 경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전 인생을 걸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려고 헌신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도 예수님께서 ego-eimi 하는 순간 “예수님의 실존”앞에 엄청난 경외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어떤 작품, 어떤 사람, 어떤 순간에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느낄 때 아우라(aura)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은 예수님의 ego-eimi 선언에 세상의 그 어떤 아우라를 뛰어넘는 경외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물 길러 온 항아리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녀는 사마리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부정한 땅, 정죄 받은 땅 사마리아 지역의 위대한 첫 선교사는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입니다. 그녀는 사마리아 지역의 모세와 같고 바울과 같은 선교사입니다. 그녀의 말은 성령의 능력과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모든 사람이 그녀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수가성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고 싶어 며칠 더 머물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대로 이틀을 더 머물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요4:42)
그렇습니다. 선교사의 가장 큰 임무는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에게 사람들을 인도하였다면 자신은 조용히 사라져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은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제자를 만들기보다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예수님 뒤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결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모든 여성 선교사의 모델과도 같은 선교사요, 사마리아의 사도입니다.
https://youtu.be/XGdrt3KRUgw?si=0IoHFWV-SB0SBVv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