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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19. 2016

겉옷과 속옷을 다 내어주고 벌거벗으라!

불의와 불법에 항거하여 

초등학교 다닐 때 옥수수빵을 배급받아 먹었다. 그때 얼마나 가난하였던지. 농번기에는 모내기, 피살이를 하였고, 학교 뒷마당에서는 반 대항 퇴비 증산 운동 한다고 퇴비를 산처럼 쌓았다. 파리 잡아오기, 쥐꼬리 모아오기, 소똥 모아오기 등 요즘 학생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하였다. 여름이 다가오면, 송충이를 잡는다고 전교생이 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용모가 단정한지 검사하는 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빨간 다라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나를 목욕시켰다. 일 년 내내 목욕 한 번 안 한 나에게 “이놈 때가 왜 이리 많아!” 하면서 등짝을 두드리면서 살갗을 빡빡 미는데 피가 나올 정도였다. 요즘 학생들은 그때의 가난을 상상도 못 할 것이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경제 사정은 어떠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성경을 읽으면 그때 사람들도 어느 정도 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처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중과세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세와 로마의 세금에 시달렸다. 


예루살렘 성전은 21세 이상 성인에게 매년 반 세겔의 세를 받았다.(마17:24-27) 그뿐 아니라 성전을 방문할 때마다 교묘한 방법으로 백성을 수탈하였다. 그들은 제사에 바칠 동물 판매 이익금, 환전상의 수입, 서약을 취소할 때 받는 돈(행21:23-24), 십일조와 헌금 등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러한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불렀다. 


로마의 세는 더 가혹하였다. 토지세와 인두세, 통관세와 온갖 부역에 백성들은 시달렸다. 로마의 세를 거두는 세리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까지 하면서 저들을 괴롭혔다. 결국, 많은 사람이 거지 아니면 강도가 되었다. 성경에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과부 이야기, 소경 거지, 앉은뱅이, 문둥병자, 다리 저는 자, 귀머거리, 정신 장애자, 한적한 곳에서 행인들을 터는 강도들의 모습을 그린다. 


예수님 당시는 사회 경제적으로 극심한 불평등의 사회였다. 부자들은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곡식을 쌓아두고 날마다 호의호식하였지만, 가난한 자들은 하루 먹을거리를 걱정하며 날품을 팔아야 했다. 만일 고용되지 못하면 그날은 온 가족이 종일 굶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셨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0) 유대인들은 옷이 속옷과 겉옷 딱 두벌이다. 만일 속옷과 겉옷을 다 벗어 주면, 벌거벗게 된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마태복음은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라고 했지만, 누가복음은 겉옷을 빼앗는 자라고 하였다.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눅6:29) 송사하는 자는 빼앗는 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가난한 자의 옷을 빼앗으려는 자 앞에 예수님은 차라리 벌거벗으라신다. 


사실 유대 법에 따르면 겉옷은 압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불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출22:26) 그런데 지금 빚진 것을 받기 위해서 속옷을 달라고 송사가 벌어졌다. 속옷을 요구하는 것을 보아서 지금 이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부자들은 스펀지를 짜듯이 가난한 자들을 꽉 짜서 마침내 속옷까지 빼으려 하였다. 가난한 사람의 냄새 나는 속옷이 얼마나 한다고 그것을 달라고 소송을 벌였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겉옷까지 다 주고 벌거벗은 채 나오라고 하셨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법적인 권한을 주장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내주고 벌거벗고 수모를 당하며 사는 것이 낫다고 이 본문을 해석한다. 이 사람이 속옷과 겉옷을 주고 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런 해석을 하는 걸까?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백성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시는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월터 윙크(Walter Wink)는 이렇게 해석한다. “너 내 옷을 원해? 자, 여기 있으니 모두 가져가라! 너는 이제 내 몸뚱어리를 빼놓고는 모두 차지하였구나. 다음엔 내 몸뚱이를 가져갈 참인가?


유대교에서 벌거벗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죄악된 이스라엘이 결국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수치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3년 동안 벌거벗고 다녔다.(사20:1-6)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부자들 앞에서 벌거벗으므로 그들의 의도를 만천하에 보여주라는 뜻이었다. 당시 법 시스템, 사회 체제에서 가난한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진 자들이 얼마나 이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밖에 할 것이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월터 윙크의 해석에 거부감을 가질지 모른다. 악법도 법이니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도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받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뺨을 칠 때 항의하셨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18:23)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모욕당한 것에 화가 나서 한 말이 아니라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사도 바울 역시도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항의하였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행16:37)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불의와 불법에 대하여 항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조건 당하며 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세상의 불의와 불법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침묵하며 무조건 따르는 것은 아니다. 말할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몸으로 저들이 얼마나 불의한지를 폭로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다. 

1960년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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