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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16. 2016

경제정의, 분배정의

히브리인은 이집트에서 종 생활하던 보잘것없는 인생이었다. 누구라도 짓밟으면, 아무 소리 못 하는 천민이었다. 그들 중에 잘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언약 공동체를 이루며 나라를 세웠다.


그들이 세워야 할 나라는 이집트에서 보았던 제국이 아니었다. 모두가 차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다. 그 나라의 원칙은 미쉬파트(mishpat)와 체다카(tzedakah)다. 미쉬파트는 재판관에 의한 판결을 의미한다. 유대 사회는 공명정대하게 법이 집행되어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인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면, 미쉬파트를 어기는 것이다. 체다카는 더 실질적이고 덜 절차적인 개념으로서 분배 정의, 곧 경제 정의를 가리킨다. 체다카는 자선과 정의 개념이 결합하였기에 번역하기 매우 어렵다. 미쉬파트가 법률적으로 강제된 의무를 뜻한다면, 체다카는 도덕적인 의무, 자비와 연민을 촉구한다. 1)

유대인은 매년 유월절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어떤 뜻으로 나라를 세웠는지를 되새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 생활하던 것을 기억하려고 누룩을 넣지 않은 맛 없는 빵과 쓴 풀을 먹었다. 초막절에는 안락한 집을 떠나 비바람이 들이치는 허술한 천막에서 지낸다. 과거 어려웠던 시절, 모두가 한 분 하나님 아래서 평등하게 살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는 절기다. 그들은 절기를 지키면서 평등한 나라를 꿈꾸었던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약자, 가난한 자, 병든 자, 모두가 다 하나님 자녀다. 그들은 보호받아야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이었다. 성경은 약자들을 위한 관심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여호와는 묶인 자들을 풀어주신다.

여호와께서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꾸러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신다.

여호와께서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시나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시146:7-9)


구약은 체다카를 단순히 개인적 자선 행위로 한정하지 않고 공동체의 의무로 여겼다. 수확 중 일부는 가난한 자를 위해 남겨두었다.(레19:9-10, 신15:1-2) 7년 안식년을 지켰는데 제 3년과 6년에 거둔 수확물의 십일조는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 (신26:12) 안식년에 경작하지 않는 땅에서 자생적으로 거두어지는 소산은 가난한 백성의 것이었다.(출23:10) 희년이 되면 모든 빚을 다 청산하여 주고, 노예는 풀어주고, 땅은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신15:1-2)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매년 유월절을 지키며 건국 이념을 되새겼지만, 부자들이나 권세자들은 경제정의를 잘 지키지 않았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7,8) 선지자들은 목놓아 경제정의와 공의를 외쳤지만, 기득권층은 한 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다시 바빌론의 노예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다.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셔야 할 이유를 설명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초대교회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힘을 다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무 상통하였다. 바나바 같은 부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도 바울도 끊임없이 구제 헌금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체다카의 정신은 점점 사라졌다. 공동체의 구제는 개인의 자선 행위로 축소되었다. 중세 가톨릭 천년은 암흑기였다. 경제정의나 공의는 사라지고 부자와 권세자는 점점 땅을 넓혀갔다. 대부분 사람은 농노가 되었다. 중세 신학자들은 돈이 가지고 있는 영적 위험을 비판하였다. 기독교 전통을 따라 서로 도우며 자선을 베풀라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동시에 돈은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 전체에 필요한 것임을 인정하였다. 종교개혁자들도 중세 가톨릭이 주장한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칼빈이 살았던 16세기는 격변의 시대였다. 종교전쟁으로 유럽은 황폐하였다. 그런 가운데 상업 무역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는데 아직 통제되지 않는 상태였다. 빈부의 격차는 벌어지고 중세 봉건 사회는 무너져 갔다. 제네바는 소도시였다. 1537년 만 명의 시민이 살던 제네바가 1559년에는 2만 명으로 불어났다. 불과 20년 만에 인구가 두배로 증가하였다. 농촌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제네바는 점점 탐욕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제네바에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이 있다. 반면 부정한 이득을 탐하는 허욕과 탐욕에 의한 야망으로 눈이 뒤집힌 다른 사람들이 있다.”2)


칼빈은 가르쳤다. 모든 부는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규범으로 재분배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8:15의 말씀을 강론하면서 부의 재분배 이론을 펼쳤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5)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거두었다. 모세는 그들에게 각자가 모을 수 있는 한 모으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루 사용량보다 더 많이 모았지만, 자신에게 할당된 한 호멜 이상 가져가지 못 했다. 왜냐하면, 남는 음식은 그날 바로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져 모두가 만족할 수 있었다.

탐욕이나 신앙의 부족 때문에 과도하게 긁어모았던 만나가 당장에 썩어버렸던 것처럼, 형제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모은 재물은 저주받은 것으로 곧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먼 장래를 위해 돈을 비축하며, 우리의 가련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부자 되는 길이 아니다. 물론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더 우아하게 사는 것이 나쁠 정도로 평등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남을 희생시켜 가면서 자신의 부를 쌓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평등은 지켜야 한다.” 3)

고광필 교수는 이것을 차등화된 평등(a differentiated equality)으로 보았다. 4)

칼빈의 후예인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사회경제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슬로테마커 더 브라위네(J.R.Slotemaker de BruÏne) 같은 사람은 경제정의와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하였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이 건설한 사회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완전한 세계란 곧 하나님 나라인데, 이 나라는 역사 안에 있는 현실 사회와 동일시할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사회를 판단하기 위한 규범적 표준으로 기능할 뿐이다. 사회 변혁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5)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근대 100년을 보내면서 사회 경제 정의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신학자가 이론적 근거를 만들었다.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존재다.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개인적 책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도 담당해야 한다. 모든 경제적 재화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탁하신 것으로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한다. 경제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 따라서 경제 정의와 소득의 정당한 분배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구약에서 강조한 체다크를 이 땅에서 이루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지금 경제정의가 비교적 잘 이루어진 나라를 만들 수 있었다.


한국은 지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막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있다. 경제 윤리는 실종되고 정치와 경제가 한통속이 되어 나라를 암흑으로 몰아가고 있다. 돈을 우상시하는 자본주의를 길들이기는 쉽지 않다. 정치가들에게 경제를 맡기면, 언제고 다시 또 부정할 것이다. 시민사회가 철저히 감시 감독하지 않으면, 경제정의는 이룰 수 없다. 감시 감독을 위하여 투명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세월호 7시간을 밝히라는 것은 정치권만을 향한 요구는 아니다. 정치 경제 모두가 투명하라는 시민 사회의 요구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요즘 우리가 겪는 진통을 다 겪으면서도 정신적 영적 리더로서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나갔다.


칼빈의 후예를 자처하는 한국 기독교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부패한 기득권층을 옹호하면서 함께 부패하고 타락할 것인가? 아니면 구약의 체다크 정신을 되살리려 노력한 칼빈주의자들처럼 경제 정의를 세우는데 앞장설 것인가?


주(註)

1. 차이의 존중 / 조너선 색스 지음 /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 194쪽

2. 건설적인 혁명가 칼빈 / 프래드 그래함 지음 / 김영배 옮김 / 생명의 말씀사 / 1986년 / 143쪽

3. 칼빈 고린도후서 주석 / 존 칼빈 지음 / 성서교재간행사 / 1990년 / 171쪽

4. 캘빈의 경제 윤리 규범에서 본 사회 양극화 현상 / 고광필 씀 / 목회와 신학 2008년 8월호 / 두란노 / 161쪽

5. 네덜란드 개혁주의 사회사상에 있어서의 경제정의론1 / 이상원 씀 / 신학지남 2000년 봄호 / 신학지남사 /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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