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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12. 2016

사람의 가치

수년 전 나는 지인이 일하는 옷 가게에서 패션쇼를 하는데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평생 패션쇼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경험 삼아 한 번 가기로 하였다. 알고 보니 유명 디자이너가 자기 가게에서 VVIP 손님 몇 명만 모시고 하는 작은 패션쇼였다. 건물은 한강을 내려다 보며 남산 중턱 좋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3층 테라스에 원형 테이블이 줄지어 있고 그 위에는 근사한 저녁 식사가 차려 있었다. 시간이 되자 귀부인들이 커다란 외제 차를 타고 왔다. 사장은 1층까지 내려가서 직접 손님을 접대하였다. 귀부인들은 도도하게 목을 빼고서 한껏 우아한 표정으로 각기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말도 사근사근 속삭이며 교양 있는 여성답게 행동하였다. 패션쇼가 끝나고 디자이너는 자신이 이번 가을을 위하여 특별히 디자인한 옷이라고 소개하였다. 동대문 어느 옷가게에서 봄직한 스커트 하나에 900만 원을 부르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귀부인들은 하나도 깎지 않고 그 스커트를 샀다. 소위 명품족이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잠깐 엿보았는데 정말 별천지 같았다.


신영복 씨의 ‘담론’에 교도소 명품족 이야기가 있다.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죄수복을 그냥 입지 않고 양재공장에 부탁해서 새로 박음질하고 다려 입는다. 사회로 치면 명품족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에서는 명품을 걸치면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으스댈 터였다. 그러나 재소자들의 시선은 결코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꼴 갑지 않다는 듯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놀고 있네.’ ‘나가면 또 들어오게 생겼다.’ 좁은 감옥 안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죄명이 뭔지, 형기가 얼마 남았는지, 그의 인간성과 성격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알고 나면 의상은 무력해진다. 아무리 잘 꾸미고 차려입어도 그의 속까지 감출 수는 없다.


교도소와 달리 바깥세상에서는 그 사람의 깊이와 폭을 다 알 수 없다. 속을 모르기 때문에 겉만 보고 평가하고 판단하기 쉽다. 그래서 세상에는 어떻게 해서든 명품을 걸쳐서 남을 속이려는 얍삽한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하여 알 만큼 아는 사람은 겉으로 꾸민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는다.


구약성경에 보면 물돼지 가죽신을 신고 수 놓은 옷을 입으며 코에는 코걸이 귀에는 귀걸이 팔에는 팔찌와 온갖 금, 은으로 장식한 여인이 나온다. 그녀의 화려함은 국제적 명성을 얻을 정도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몇천만 원짜리 백에 명품 옷을 걸친 명품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겔16:15) 성경에서 음행은 일반적으로 물질 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경우를 상징하여 쓸 때가 많다. 에스겔 선지자 시대 사람은 오늘날 물질 숭배에 빠진 현대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최고고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한다. 돈을 유일한 가치척도로 삼는 세상은 틀림없이 부패한 세상이다. 요즘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연봉 1억이니 5천이니 한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고대 사회에서 사고 파는 노예처럼 물건 취급하는 것 같아 섬뜩해진다.


상품의 가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뉜다. 사용가치는 상품의 쓸모나 용도와 관련된다. 교환가치는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난다. 쉽게 표현하면 ‘얼마짜리냐?’ 하는 말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교환 가치가 훨씬 중요하다. 경제학에서 가치라는 개념은 곧 교환가치를 의미한다.


상품 A와 상품 B가 각기 만 원짜리이면 둘 다 교환가치는 같다.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 경제학자는, 상품 생산에 드는 노동 비용이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상품 A와 상품 B를 생산하기 위한 비용, 특히 노동의 질이나 방식은 같을 수 없다. 물신주의(fetishism, 물질 숭배)는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의 노동 가치를 동질화하고 양으로 환산함으로써 모든 것을 물건과 물건의 관계로 보게 한다. 결국, 사람도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얼마짜리입니까?” 이런 질문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대 노예와 같이 물건 취급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해마다 미스코리아를 선발하는 대회가 열린다.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여인들이 줄지어 무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은 노예시장을 연상케 한다. 날씬한 몸매를 한 여자의 몸무게, 키, 신체 치수를 낱낱이 공개하여 평가를 한다.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지 않는 여성도 자신의 몸무게에 관심을 가지고 일상적으로 다이어트를 감행한다. 요즘 여자들은 암소처럼 몸무게로 평가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질 낮은 것은 없다.


연봉을 몇십억을 받으면 훌륭한 사람인가? 미스코리아의 몸매를 가지면 아름다운 사람인가?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은 일반적으로 사회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겉에 걸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어두운 눈의 비늘을 벗겨내는 지혜가 있다.


당신은 사람의 가치를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당신은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만물의 영장(Lord)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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