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윤리 사상은 지금과 매우 달랐다. 고대 사회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선으로 여겼다. 조선 시대에는 정치철학인 유교 윤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잔인하게 숙청하였다. 조선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충효 사상을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규범으로 삼았다. 이것은 한마디로 조선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이었고 윤리였고 절대 선이었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신을 거부하였고 젊은이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때 소크라테스의 부유한 친구인 크리톤은 만반의 준비가 되었으니 탈옥할 것을 권유한다. 크리톤은 ‘친구의 도리’라는 이유를 들어 탈옥하자고 말하였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생명과 교육을 제공한 것은 국가와 법이라고 주장한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생명과 교육을 부모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법과 국가가 그 부모를 보호하여 그들을 살리며, 또한 결혼과 교육에 관한 국가법이 없었다면, 그 개인은 물론 가족도 교육도 얻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신성한 것이고 부모보다 더 존경받아야 한다. 전시나 평화 시는 물론이고 국가가 부당하게 죽으라고 명령해도 순종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말하였다.
“나라가 노했을 때는 아버지가 노했을 경우보다는 부드럽고 존경하는 태도로 달래야 하며 설득하거나 설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나라의 처벌을 받았을 때는, 그것이 감금이든 태형이든 처벌에 조용히 참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라가 우리를 부상을 입거나 죽게 될 싸움터로 이끌어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따라가는 것이 올바르다. …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행을 가해서는 안 된다면 더군다나 국가에 대해 폭행을 가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최고선을 깨닫기를 원한다면, 국가 통치 기술에 관한 학문 곧 정치학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고대 사회에서 국가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실체로 간주하였다. 공동체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법을 집행하였으며 그것은 곧 ‘공동선’이고 윤리였다. **
반면에 성경은 윤리 개념을 달리 생각하였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왕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때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선언하였고 정면으로 왕을 대적하였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윤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성경은 국가와 공동체 유지를 위한 법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에 두었다. 그리므로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시민 불복종과 저항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저항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의 백성들에게 와서 변론하자고 말씀하신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이 불편부당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사명을 받았을 때 자신은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는 하나님 앞에서 반론을 제기하였다.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적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때로 변론하고, 이해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고 논쟁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뜻 자체가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윤리는 교조적(敎條的)이거나 독선적이지 않다.
문제는 기독교와 국가가 연합하여 윤리를 만들어 낼 때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고 그 이데올로기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는 비극적 사건이 생겨난다.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바로 그러한 전철을 밟았다. 물론 기독교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라도 이를테면 모슬렘이 국가이데올로기와 합쳐져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중세 가톨릭이란 단일한 종교와 국가가 연합하여 이데올로기를 만들었을 때 그것은 무소불위하였다.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마녀사냥을 하여도 누구 하나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복잡미묘하게 변하였다. 한 지역의 왕이나 제후가 기독교나 가톨릭을 믿으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은 무조건 군주의 종교를 따라야 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치 윤리요, 이데올로기였다. 문제는 종교개혁 사상이 사람들에게 퍼져가면서 군주의 종교와 그 나라에 사는 한 개인의 종교가 다른 상황이 생겨났다. 더욱이 국가 권력의 속성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국가와 종교가 합쳐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고 그 이데올로기로 인한 종교 전쟁은 일반적인 전쟁보다 더 참혹하였다.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권력자의 말에 순종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윤리가 무엇인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일 수 있는가?
국가 통치자의 종교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공동체의 체제 유지를 위한 윤리가 과연 합당한가?
여기서 계몽주의자들은 국가 윤리와 종교가 말하는 윤리 모두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가 정해준 윤리가 아닌 개인이 자신의 윤리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누구도 자신을 강제할 수 없으며 결국 나의 생명과 삶, 종교와 윤리는 내가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토머스 홉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정치 질서를 세우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거꾸로 말하면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존 로크는 사회 질서의 궁극적 근원은 굶주림이라고 보았다. 말은 조금 달라졌지만 토머스 홉스나 존 로크 모두 비슷한 결론이다. 루소는 자기 보존이라는 자연적 본능이 윤리의 가장 기본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였다. *** 문제는 이러한 자기 보존, 생존 본능을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 보니 서로간에 충돌이 생겨난다. 여기서 사회 계약론이 나온다. 서로 간 약속으로 공동의 선, 공동의 질서, 공동의 윤리를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이제는 국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는 한 개인 개인이 모여서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민 주권이론으로 발전하였다.
문제는 말이 좋아 국민 주권이지 각자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진정 공평과 정의 같은 도덕적 선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하여 누가 더 큰 목소리를 내느냐로 결정한다. 사람들은 힘을 모으고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 권력을 행사하였다. 민주 정치, 대의 정치는 이제 서로의 이익을 위한 치열한 싸움터로 바뀌었다. 독일은 총선을 통해 온 백성이 합의하여 정권을 세우지만, 그 정권은 역사상 가장 비열한 독재정권이 되고 이기적 자국 중심주의에 함몰되어 세계대전을 벌이고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였다. 주권을 가진 백성이 합의하여 정권을 세운다고 해서 반드시 바른 도덕성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가마다 자국 이익을 위하여 도덕도 없고 법도 없는 그야말로 잔혹한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을 외친 계몽주의자들의 생각은 한낮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 계약으로 윤리적인 국가가 세워지지 않는다. 국가가 바른 윤리와 정당한 통치를 하려면 국민 주권과 사회 계약론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윤리가 필요하다.
국가나 사회나 단체나 개인이나 자기 이익만을 위하여 싸우는 치열한 싸움터에 기독교가 함께 싸울 이유는 전혀 없다.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모두 제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기독교는 저들의 시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측량하고 선지자적 선포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도 변론하도록 훈련받아온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에 마지막 등불이다. 역사를 통하여 여러 차례 실수한 것도 많지만, 그렇다고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세상에서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선지자가 되어야 하는 이 정신을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윤리를 회복하고, 분명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바야흐로 정치 철이 다가오고 있다. 제발 정치인들을 대신해서 여야로 갈라쳐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종교인들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윤리와 기준을 잃어버리고 각자의 이익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만이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윤리와 복음을 회복한다면 이 나라에 소망이 있다.
주(註)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 플라톤 지음 /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2년 / 73-74쪽
**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 요람 하조니 지음 / 김구원 옮김 / 홍성사 / 2016년 / 167쪽 이하
*** 완전한 진리 / 낸시 피어시 지음 / 홍병룡 옮김 / 복있는 사람 / 2012년 / 704-7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