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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17. 2015

어머니, 나의 어머니

조선 시대 외척이 득세하여 나라를 어지럽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조선 역사를 조금이라도 읽어보면 이러한 사례들은 무수히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예외도 있다. 영조의 대비인 인원왕후 가문이다. 인원왕후의 부모는 딸이 왕비가 된 다음에는 아무리 부탁해도 결코 딸을 딸로 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을 만날 때 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다른 신하들처럼 엎드려 있었다. 딸이 잠깐 얼굴 보기를 청하면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곧 다시 숙였다. 어머니는 궁궐에 들어왔을 때 매번 새벽에 일어나 딸이 자는 침문 밖에서 딸이 깨기를 기다렸다. 인원왕후가 어머니께 자기가 누운 자리로 들어오라고 청해도 극구 사양했다. 딸과 한 자리에 있을 때는 옷깃이라도 닿을까 봐 조심했고, 딸이 어머니 손을 잡으면 공경하여 받들고 편치 않은 듯 행동했다. 한중록에서 혜경궁도 정순왕후네를 비판하면서 “왕실의 인척이 된 후 인원왕후 집안처럼 몸을 가졌으면 뉘 나무라리오”라고 말하였다. (권력과 인간, 정병설 저, 문학동네, 48~49쪽)


이 책을 읽는 중에 문득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내가 목사가 된 후 단 한 번도 나를 아들로 대하지 않았다.

언제나 “목사님”이라고 존대했다. 어머니는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기름 부음 받은 종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다. 사실 어머니의 눈으로 본다고 해서 아들을 항상 좋게만 볼리 만무다. 아들의 허물과 잘못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어머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아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석에서는 자유롭게 대하실 수 있으실 텐데 여전히 그렇게 하신다.

내가 부목사일 때 한 장로는 나를 부를 때 꼭 “어이! 부목”하고 불렀다. 나중에 아들과 아버지가 한 교회에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며 나를 강제로 선교지에 내보낼 때 그 장로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번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마라."  선교사 훈련도 받지 않았고, 선교에 소명도 없는 나를 필리핀 선교사라고 보내는데 눈물이 났다. 매달 100만 원 이외에 아무것도 지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필리핀에 들어갔다. “20만 원이면 살 수 있는 곳이니 그것도 과분한 줄 알아라." 그렇게 말한 장로에게 필리핀에 와서 한번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집세만 35만 원이었고, 매달 비자 연장비만 해도 한가족 4명이 20만 원이 들었다. 아이들 학비며 생활비. 정말 앞길이 캄캄하였다. 그래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필리핀 선교를 이루어갈 수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필리핀 선교 활동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목사가 비록 부족하고 모자란 점이 있지만, 그도 하나님의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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