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30
중세 서양에서 개인은 가족에 속하였다. 개인은 가장의 감독 아래 집단적 소유와 집단적 책임과 집단적 행동을 강요당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성의 인권은 없었다. 여성은 가정 안에서 열등한 존재였으며 노동하는 존재였다. 심지어 상류 계급의 여자도 경제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요리는 물론이고 하녀들과 함께 옷감을 제조하며 가정 경제를 이끌었다.
중세 결혼 방식은 문트 결혼(Muntehe)과 프리델 결혼(Friedelehe)으로 나뉜다. 남편이 부인에게 합법적인 지배권을 가진 결혼이 문트 결혼이라면, 프리델 결혼은 남녀 간에 사랑으로 이루어진 소위 연애결혼이다. 프리델 결혼이 가끔 있었지만, 이는 합법적인 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둘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상속권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결혼은 문트 결혼이었다.
귀족들은 문트 결혼을 통해 집안끼리 동맹을 맺었다. 나이, 외모, 사랑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혼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정치적인 동맹이므로 역사학자들은 이를 결혼 장사(Ehehandel)라고 하였다. 11세기 초 젊은 공작 발두인 2세는 공작의 딸 플란덴과 결혼했다. 첫날밤을 맞이한 신랑은 초야를 치르기도 전에 줄행랑을 쳤다. 신부가 너무나 못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신부의 삼촌에게 잡혀 성에 갇혀 살아야 했다. 이런 부부는 억압 때문에 형식적으로 결혼을 유지하였으며 평생을 애정없이 살았다.
평민 역시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오는 남자에게 딸을 주었다. 여자는 그만큼 큰 노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여자의 일생이란 고달프기만 하였다. 물론 개중에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는 남편도 있었지만,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달콤한 사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의 결혼생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자 중에 제일 먼저 결혼한 사람은 마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다. 부써는 도미니칸 수도회에서 탈퇴한 후 1522년 수녀 출신 엘리자베스(Elizabeth Bucer)와 결혼하였다. 부써와 엘리자베스는 13명의 아이를 낳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성격이 활달하고 따뜻하여 부써의 집은 ‘의로움의 여관’(the inn of righteousness)이라고 불렸다. 부써는 동료 사역자들에게 결혼 생활이 얼마나 좋은지를 이야기하며 결혼할 것을 권하였다. 칼빈의 결혼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 역시 부써였다.
칼빈과 지속적인 교류가 있던 필립 멜랑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역시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하였다. 멜랑톤의 부인 카타리나 크랩(Katharina Krapp)은 헌신적인 내조와 재기 넘치는 유머로 유명하였다. 1539년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대표들이 토론을 위해 모였던 프랑크푸르트 협의회 때 칼빈은 멜랑톤과 교제하였다. 한번은 식사시간에 생각에 잠겨 있는 칼빈을 가리키며 멜랑톤이 놀렸다. “저 친구 결혼 생각에 빠져 있군.” 둘의 우정은 허물이 없었으며 나이를 뛰어넘어 평생 지속하였다.
부처와 멜랑톤의 가정을 보면서 칼빈도 결혼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칼빈은 결혼하고 싶어도 결혼할 수 없었다. 그는 지독히도 가난하였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사역자로 일했지만, 사례비를 받지 못하여 친구들이 돈을 모아준 것이 첫 번째 생활비였다. 친구들의 도움도 한계에 다다르고 그는 마침내 생명처럼 귀히 여기는 책을 팔아 생계비를 마련했다. 이런 상황에 결혼은 사치였다.
그래도 종교개혁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는 데 아내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주변의 권유에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1539년 5월 19일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는 결혼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저는 일단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딱 반해서 그녀의 결점들까지 포용하는 그런 지각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에게 매력적인 아름다움은 이런 것입니다. 정숙하고, 순종적이고, 까다롭지 않고, 실용적이고, 인내심이 많고, 제 건강을 염려해 주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칼빈이 생각하는 부인상을 보면, 그도 역시 그 시대의 아들임이 틀림없다. 그가 원하는 여성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그가 편지에 썼듯이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30대부터 만성 감기에 천식, 소화불량으로 고통받았다. 때때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강의를 중단하거나 취소할 때도 있었다. 그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의 병은 날로 심하여 관절염, 위궤양, 치질, 결석, 늑막염, 악성 결핵으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가난하고 병든 목회자에게 누가 결혼할까?
그러기 때문에 부써나 파렐은 더욱 칼빈에게 아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중매하였다. 첫 번째 소개받은 여자는 독일 귀족 출신으로 부유한 여성이었다. 여자의 오빠는 종교개혁 사상에 심취하였고, 자기 여동생이 칼빈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 여인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높은 신분과 부유함 때문에 자신과 맞지 않을 듯싶어 염려하였다. 칼빈은 난감한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하여 그 귀족 여성에게 프랑스어를 습득할 것을 요구하였다. 프랑스어를 습득하는 시간 동안 여자의 마음이 바뀌기를 소망했다. 과연 칼빈의 예측대로 그녀는 프랑스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고 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두 번째 신붓감은 파렐이 중매하였다. 이번에는 칼빈이 원하는 조건에 맞는 여자였다. 프랑스어를 하고, 부유하지 않았으며, 개신교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다. 문제는 칼빈보다 15살이나 연상이었다. 칼빈은 이 혼사를 원치 않았다. 평균 연령이 40을 넘지 않던 시대에 46살 여성은 결혼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나이였다.
세 번째 신붓감은 많은 사람이 칭찬하고 추천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가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큰 부자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덕망은 널리 알려져 칼빈은 마음이 끌었다. 칼빈은 동생을 시켜서 그 여인에게 접촉하였다. 결혼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 칼빈은 파렐에게 주례를 부탁하였다. 칼빈은 파렐에게 편지를 쓰면서 끝 부분에 “만약 이번에도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난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예측대로 그녀는 청혼을 거절하였고 칼빈은 실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다시 파렐에게 편지하였다. “아직 아내를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제 아내를 구할 노력을 해야 하는지 망설여집니다.”
신부 찾기를 멈추려고 할 때 칼빈에게 한 여인이 나타났다. 신부는 멀리 있지 않았다. 자기 교회 성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로서 과부였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녀는 네덜란드의 리쥐(Liege) 지방에서 1533년 이단으로 정죄 받고 추방된 재세례파 교인 렘버트 드 뷔르(Lambert de Bure)의 딸이다. 그녀는 재세례파 지도자인 장 스토르뒤르(Jean Stordeur of Liege)와 결혼하여 자녀를 일곱이나 두었다. 1537년 스토르뒤르는 종교 개혁자들과 토론하기 위해 제네바를 찾아왔을 때 칼빈을 만났다. 후에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할 때 장 스토르뒤르 가정도 스트라스부르그로 와서 칼빈의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 시기 동안 칼빈은 자주 이들 가정을 방문하여 지도하였다. 마침내 스토르뒤르와 이들레트는 칼빈의 신학과 설교에 감화를 받고 재세례주의를 포기하고 개혁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재세례파 신앙을 포기하는 표시로 자기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주었다.
불행하게도 1540년 흑사병이 스트라스부르그를 덮쳤을 때 스토르뒤르는 아내와 두 자녀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들레트는 남편을 잃은 큰 슬픔에 빠지게 되었고, 칼빈은 성심을 다해 그녀의 아픔을 돌보아 주었다. 목회자로서 칼빈은 그녀를 방문하면서 그녀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미녀라고 할 수 없지만 조용하고 겸손하며 온화한 여성이었다. 비록 많은 고난과 아픔을 겪었지만, 꿋꿋이 이겨나가는 그녀의 용기와 신앙에 감화를 받았다. 몇 번의 결혼 시도에 실패한 칼빈은 감히 청혼할 용기가 없었다. 그때 부써가 한마디 하였다. “이들레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머리 좋고 마음씨 따뜻하고 헌신적이며 정숙한 이들레트에 연민의 정을 느낀 칼빈은 부써의 한마디에 큰 용기를 얻고 청혼하였다. 사실 과부와 결혼하는 문제는 쉽지 않았다. 과부가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헌신하는 것을 신앙의 미덕으로 삼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재세례파 출신의 과부와 종교개혁자 칼빈의 결혼이기에 더욱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큰 갈등을 느끼지 않고 패기있게 결혼을 밀어붙였다. 31살 동갑인 둘은 1540년 8월 초 결혼하였다.
결혼 6주 후 그의 아내가 병석에 누웠을 때 칼빈은 파렐에게 편지하였다.
“사실 주님은 우리의 결혼이 너무 행복할까 봐 정도에 지나치지 않도록 우리의 기쁨을 처음부터 절제하였습니다.” 칼빈이 겉보기에는 무정해 보이고 차가워 보이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하였다. 그는 그녀를 “내 인생의 훌륭한 동반자,” “내 사역의 신실한 조력자,” “보기 드문 여성”이라고 불렀다. 동료 개혁자 베자는 그녀를 “근엄하고 존경할 만한 여성”이라고 평하였다. 칼빈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으나 그 기간은 9년에 불과했다. 그의 아내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549년 4월 초 제네바에서 숨을 거두었고, 칼빈은 평생 그녀를 마음에 두고 그녀가 남겨 놓은 두 아이를 양육하며 독신으로 지냈다.
참고도서
1. R. 스토페르, 인간 칼빈, 박건택 옮김 (서울 : 정음출판사, 1983)
2. 헤르만 셀더르하위스, 칼빈, 조숭희 옮김 (서울 : 대성 Korea.com, 2011)
3. 필립 샤프, 스위스 종교개혁, 박경수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
4. 손병호, 장로교회의 역사, (서울 : 그리인, 1993)
5. 쟈크 르 고프, 서양 중세 문명, 유희수 옮김 (서울 : 문학과 지성사, 2004)
6. 양태자, 중세의 뒷골목 사랑 (서울 : 이랑, 2012)
7. 양태자, 중세의 뒷골목 풍경 (서울 : 이랑, 2012)
8. 김동주, "칼빈의 결혼과 가정에 관한 소고" , ⌜역사신학 논총⌟ 제6집,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