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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21. 2018

거룩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거룩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는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함이라고 설명한다. 성경은 거룩을 어떻게 이해할까? 히브리어로 거룩은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하며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거룩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반대로 말하면, 세상은 거룩하지 않다. 아무리 뜻이 높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세상에 속한 것 중 거룩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단언한다. 예루살렘 성전도 그 자체로는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돌무더기에 불과하다.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진 것은 그곳이 그저 세상의 건물과 다를 바 없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외면하면 그게 무엇이든 거룩하지 않고 속될 뿐이다. 


가끔 성직자 중에 화려한 가운을 입고 금색 후드를 하고 근엄한 목소리와 표정을 지으면 거룩한 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잘못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면 그도 냄새나는 인간에 불과하다. 거룩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이 거룩의 원천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실 때만 거룩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보증하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 놓았는데 그 뜻에 부합하게 행동하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거룩(명예)은 더럽혀진다. 


우리 교회에 필리핀 노동자 교회가 있고, 필리핀에는 서북 필리핀 신학교가 있다. 필리핀 신학교에서 졸업하고 더 공부하기 원하는 학생이 한국 신학교에 유학을 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의 보증을 서서 한국 비자를 받게 한다. 그런데 필리핀 신학생이 한국에 와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불법 체류를 하면서 돈을 번다면 나의 보증과 명예는 땅에 떨어진다. 그 후 나의 보증은 한국 대사관에서 효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보증하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지금 하나님의 거룩(명예)을 더럽히는 중은 아닐까? 


거룩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형태(종교의식)적 거룩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윤리)적 거룩이다. 형태적인 거룩은 성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설명한다. 하나님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과 사물과 사람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그러한 구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식적으로 만나려고 하셨다. 


하나님은 시간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20:8) 

우리는 아무 때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다. 시간이란 다 똑같은 것 같지만, 하나님은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식적으로 특별하게 만나고 싶어 특별한 시간을 정하셨다.  


하나님은 장소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편만하게 거하시지만, 특별한 장소에 거하기를 원하셨다. 그곳은 성막과 성전이었다.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다. 바빌론이라고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을 까닭이 없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장소를 소중히 여겼다. 성경은 시간과 공간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시간과 공간만 아니라 사물이나 사람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하나님과 공식적인 만남을 위하여 거룩성을 유지하도록 성경은 아주 세세하게 규정하셨다. 불행하게도 개신교는 이런 시공간의 거룩성이나 예전적 거룩성을 많이 상실하였다. 이유는 분명하다. 중세 가톨릭이 형태적 거룩에 집중하면서 내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부패하고 성직자가 타락할 때 아무리 거룩한 미사를 드려도, 아무리 거룩한 시공간을 창출하여도, 그건 돌무더기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의미와 목적을 상실할 때, 그건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이고 그것은 마땅히 무너져야 한다. 


예전적 거룩의 더 큰 문제점은 우상숭배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을 느후스단이라 하여 히스기야 때까지 그것에 제사를 드렸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우상화하기도 하였다. 전쟁터에 법궤를 메고 나가면 무조건 승리할 줄 생각했다. 성인의 유골이나 뼛조각이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우상숭배다. 예수님 조각상에서 피눈물이 흐르면 사람들이 그 앞에 몰려들어 기도하는 행위도 우상숭배다. 설령 하나님이 한때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하셨다 할지라도 그것이 계속하여 거룩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하나님이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곳이 영원히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때 그 땅이 거룩할 뿐이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그곳은 보통 다른 땅과 다를 바 없는 그저 황무한 광야일 뿐이다. 형태적 거룩, 예전적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 바로 우상숭배다.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의미, 내용)을 강조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형태를 외면할 수 없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신 이유는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거룩함에 이르는 과정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였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바울 사도는 말하였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 

기독교의 생명력은 말씀대로 살아내는 데 있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목적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실 때 계획이 있었다. 정의와 공평이 강물같이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다.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고,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세우라고 하셨다. 가난한 자, 약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들이 보살핌을 받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개인 윤리뿐만 아니라 사회 윤리도 바로 세워지기를 원하셨다. 


요즘 영화 1987이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할 말은 별로 없지만, 당시 민주화와 인권을 외칠 때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 할 말이 많다. 무지막지한 전두환 군사 정권 아래에서 목숨을 희생하며 투쟁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물대포와 최루탄과 전투경찰의 위협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뒤에서 그들을 밀어주고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지지와 격려가 있었다. 그리고 교회를 포함한 종교단체들의 후원도 한몫했다. 데모하던 학생들은 전경을 피하여 교회로 숨어들었다. 서슬 퍼런 군사 정권이지만 교회에는 차마 들어오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교회의 윤리적 거룩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었다. 물론 보수 교회에서는 전두환을 찾아가 모세의 지팡이를 들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지만, 민주화와 인권을 위하여 선두에서 이끌었던 기독교 지도자들도 있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선도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대형 교회들은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 있다. 크든 작든 교회마다 성장에 목을 매며 성과 중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모델로 삼았다. 교인들에게 헌신을 강조하기 위하여 서슴없이 기복신앙을 외쳐댔다. 한국 교회는 메시지를 잃어버리고, 윤리적 거룩성도 잃어버리고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가 교회의 재정 장부를 다 뒤집어 보자고 하여도, 교회는 변명할 말이 없어졌다. 세상이 교회를 욕하고 짓밟아도 아무 할 말이 없다. 윤리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는 거룩의 형태도 내용도 다 잃어버리고 빈껍데기만 남았다. 

이제 거룩을 다시 회복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형태적 거룩의 중요한 축인 예배의 회복이 필요하다. 시간과 공간의 거룩성도 회복해야 한다. 오사카에 가면 안도 다다오(Ando Tadao, 1941~건축가)가 건축한 빛의 교회가 있다. 자그마한 예배당 전면 벽에 십자가 모양으로 구멍을 뚫어 자연광이 들어오게 하였다. 인공조명은 될 수 있는 대로 사용하지 않은 체, 십자가를 통하여 자연광이 어두운 예배당을 비추는 구조는 건물의 거룩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빛이 구원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통하여 어두운 실내에 쏟아질 때 사람들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공간이 주는 거룩함에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기도하게 한다. 나는 한국 개신교가 공간의 거룩성을 깊이 생각하며 교회 건축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비록 볼품없는 건물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특별한 시간에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한다면, 그곳도 공간적 거룩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배당은 아름다운 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에 중요하다. 어느 특정한 시공간을 찾아가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악을 제거하고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만일 죄를 지었다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예배만 드린다고 다가 아니다. 


형태적 거룩함(예배)을 유지했다면, 내용적 거룩함(윤리)도 확보해야 한다. 진정한 예배는 바른 삶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윤리를 지키고 바른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 못한다. 더더욱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사회를 개혁하고 자신을 깨끗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돌무더기에 불과하다. 거룩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늘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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