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1조)
대한민국 헌법의 주어는 누구인가?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하면 ‘대한민국’이 주어다. 그러나 헌법 전문을 살펴보면 대한민국 헌법의 주어가 다르게 나타난다. 헌법 전문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만연체 문장으로 무려 10줄이나 이어진다. 그러나 주어와 동사는 분명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중략)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헌법 전문에 의하면 헌법의 주어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 대한국민'이다. 헌법은 우리 대한국민이 투표에 의하여 만들었다. 참된 주권자인 우리 대한국민이 권력자에게 헌법을 지키라고 잠시 권력을 위임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헌법 조문은 진정한 주어를 집어넣어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헌법 1조 “우리 대한국민은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대한국민은 말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많은 시민이 나와서 목놓아 부른 노래가 헌법 1조 노래였다.1) 그것은 시험공부를 위해 생명 없이 달달 외워야 했던 헌법이 아니었다.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나라도 없던 시절 '우리 대한국민'은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였고, 장차 이 땅에 세울 나라는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였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왕도 아니고, 양반도 아니고 '우리 대한국민'이다. 광화문에서 시민이 부른 헌법 노래는 헌법 정신을 되새기는 노래였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권력자에게 헌법대로 나라를 다스리라고 요구하는 절박한 노래였다. 이 나라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친 왕정 시대 루이 14세가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조선 시대처럼 권력자 앞에 무조건 복종하는 왕정국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우리 대한국민'이다.
어느 나라든 헌법 전문을 살펴보면 그 나라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종교개혁의 후예인 스위스 연방 헌법 전문은 이러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스위스의 국민과 주(Kantone)는 천지창조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중략) 국민의 강력함은 약자의 복지를 척도로 평가되는 것임을 인식하면서, 이하의 헌법을 제정한다.”
스위스 헌법 전문을 읽어보면, 그것은 철저하게 성경에 기반을 둔 헌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율법 하면, 한자어가 뒤섞여 읽을 수조차 없는 까다로운 행정용어나 법정 용어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마음먹고 천천히 뜻을 새기며 읽으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이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운지 깜짝 놀라게 된다. 인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집트 노예들을 구원하셔서 너희가 세울 나라는 가장 약한 자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행복한 나라여야 한다며 주신 것이 구약 법이다. 구약법은 하나님께서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법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만드는 데 실패하고 망하지만, 이스라엘 대신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세우고자 하신 그 나라와 법을 연구하므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명기는 참으로 의미 있는 책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그들에게 선포하고 설교했던 율법 해설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를 정의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그들이 이 땅에서 어떤 나라를 만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규정해준다. 신명기는 조직신학적인 책이 아니라 현실에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실천적인 책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등)이 신명기 신학을 기반으로 폭정을 행하는 왕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권력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보다 인간 제국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에게 신명기는 정치를 비판하는 교과서였다. 구약학자들은 한결같이 신명기를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였다. 월터 브루그만은 신명기를 신학적 중심이라 하였고, 폰 라드는 구약의 중심점이라 하였고, 헤르만은 성경 신학의 중심이라 하였다. 신명기는 신구약 성경의 뼈대와 같은 성경이다.
신명기는 형식상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미래 지향적인 말씀이며 동시에 실천을 요구하는 현실적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사람에게 교본과도 같은 말씀이다. 만일 오늘 이 시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갈 자로 믿는다면, 신명기를 의미 있게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명기(申命記)는 매우 의미 있는 표제이다. 되풀이할 신(申)에 규칙 명(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되풀이하여 새기고 지키라는 뜻을 가진다.2) 신명기는 수천 년 전 고대 이스라엘인만 마음에 새겨야 할 법이 아니라 현대 그리스도인도 반드시 마음에 두고 새겨야 할 말씀이다. 신명기는 반드시 되풀이하여 새기고 읽어야 한다. 나는 앞으로 고대와 현대의 시대적 상황을 오가며 신명기를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명기를 살피면서 늘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이스라엘 나라의 출발점과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점은 조금 차이가 있다. 민족의 출발점은 자기 나라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간 아브라함이라면, 이스라엘 나라는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출발하였다. 신명기는 이점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16:12, 5:6, 6:12, 7:8, 8:14,13:10, 15:15, 24:18)
인간의 권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있던 저들을 구원하여 나라를 세우기 전, 법부터 주셨다. 법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었다. 장차 너희에게 나라를 줄 테니 이런 나라를 만들라는 의미였다. 너희가 내 자녀가 되어 이런 멋들어진 나라를 만들어보라! 자기 땅이라곤 한 평도 없던 저들, 인간 대접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던 저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법에 감동하였다. 약한 자를 대우하고 보호하며 약한 자가 주인 되는 나라는 생각만 해도 꿈 같은 나라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곧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나온 그들이 조직을 갖추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 생겼다. 제사장 계급도 생겨나며 체계를 갖추었다. 작은 권력이지만, 그들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부터 그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40년이 흐르는 동안, 시내 산에서 준 율법의 취지와 의미는 퇴색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형식화되기 시작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모세는 다시 한번 이 율법을 가르쳐야 할 필요를 느꼈다. 모세가 가르치려는 의도는 바로 이러하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적 해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들을 품어주시려는지를 이해하는 바탕에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신명기는 출애굽기나 다른 모세 오경과 달리 인간의 행복 추구권, 인권을 더욱 강조하여 설명한다. 신명기를 읽어나가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나는 신명기를 따스한 인간미 넘치는 책으로 읽어가고 싶다. 신명기가 그리는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모습일지, 상상하며 읽고 싶다. 신명기 정신이 오늘 대한민국에 얼마나 큰 유익이 될지, 오늘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도 고민하며 읽어가고 싶다.
주(註)
2. 한자어인 신명기가 ‘두 번째 율법’이란 의미를 가진 영어의 Deuteronomy(신명기)보다 훨씬 의미가 바르다. 영어의 Deuteronomy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한 70인 역의 번역 착오에서 나온 단어다. 칠십인 역은 신명기 17:18에 ‘이 율법서의 등사본’이란 히브리어를 잘못 읽고 to deuteronomion touto(두 번째 율법)로 번역하고 신명기 제목을 deuteronomion이라 하였다. 영어는 헬라어 제목을 그대로 이어갔다.